증산 상제님의 생애 |
증산 상제님께서 지상에 강세했던 19세기 후반의 세계 정세는 인류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위기와 전환의 시대였다. 당시 세계는 힘의 패권을 앞세워 약소국을 잔인하게 짓밟는 제국주의의 극성기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식민지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던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깊은 신음소리를 내며 처절하게 망해가고 있을 때였다.
동아시아의 조그만 나라 조선의 운명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 열강들이 침략의 손길을 뻗쳐와 국가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이 위태로웠다. 나라 안 사정 또한 지극히 어려웠다. 이미 왕조 5백년의 말기로 접어들어 탐관오리들의 매관매직과 가렴주구(苛斂誅求)가 극에 달해, 자연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유리걸식하는 자와 도적이 되는 자가 늘어나고, 곳곳에 민란이 일어나며,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불안감이 팽배해 있었다.
상제님이 오신 시간대와 장소(도기 원년, 1871년)
이러한 인류역사의 대 전환기에 상제님은 1871년 음력 9월 19일,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지금의 전북 정주시 덕천면 신월리)에서 탄강하셨다. 상제님이 태어나신 마을 객망리(客望里, 손바래기)는 상제님이 탄강하기 전에는 선망리(仙望里, 하늘의 주를 기다리는 마을)라 하였고, 어천하신 뒤에는 신월리 신기(新基)마을 곧 새터로 고쳐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제님의 아버지 되시는 분은 강흥주(姜興周)로 얼굴이 호상(虎相)이고 음성이 우렁찬 천하의 장사였으며 농사를 지어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고 계셨다. 상제님의 어머니 되시는 분은 권양덕(權良德)으로 용모가 단아하시고 붕어를 잡아오면 고기의 배를 가르기 어려워 할 정도로 성품이 선하시고, 천성이 조용하시고 남의 말을 하지 않는 분이셨다.
생명 살리기에 힘쓰시고 천지에 대한 혜각이 열리셨던 어린 시절
어릴 적 상제님은 마당 구석에 화초를 심으시고, 밭둑에 나무를 즐겨 심으셨으며, 미물곤충이라도 위기에 빠진 생물을 보시면 힘써 구하셨다. 여섯 살 되시던 해에는 풍물굿(농악)을 보시고 혜각이 열리셨다.
이 해에 부친께서 훈장을 구하여 아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하늘 천(天) 자와 땅 지(地) 자는 집안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따라 읽었으나 그 뒤로는 따라 읽지 않으셨다. 훈장이 아무리 타일러도 끝내 읽지 않으니 부친이 안으로 불러들여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하늘 천(天) 자에 하늘 이치를 알았고, 땅 지(地) 자에 땅 이치를 알았으니 더 배울 것이 어디 있사옵니까?”라고 말씀 하셨다.
일곱 살 되시던 하루는 어느 글방에서 놀랄 경(驚) 자 운(韻)을 받아 다음과 같은 글을 지으시어 천지의 주재자이신 소년 상제님의 기개를 나타내셨다.
遠步恐地坼이요 大呼恐天驚이라
멀리 뛰려 하니 땅이 무너질까 두렵고,
크게 소리치려 하니 하늘이 놀랄까 두렵구나.
(道典 1:15:9)
머슴살이와 산판꾼의 삶을 체험하셨던 10대 청소년 시절
증산 상제님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집안이 워낙 가난해 14~17세에 학업을 중단하고 사방을 주유하셨는데 이때 상제님은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도 하고 산판에서 나무를 베는 벌목꾼 일도 하시며 고통받는 하층 백성들의 삶과 고통을 몸소 체험하셨다. 그후 이곳저곳으로 유랑생활을 하다가 집에 돌아와 수년동안 객망리 시루산 상봉을 주야로 오르내리며 공부하셨다. 상제님은 이때 당신의 호를 마을 뒷산의 이름을 취하시어 증산(甑山)이라 하셨다.
상제님의 존호 증산(甑山)은 시루 증(甑), 뫼 산(山)으로 천지의 가을을 맞아 인류문화를 성숙시킨다는 깊은 의미가 들어있다.
실패로 돌아가는 갑오 동학혁명을 지켜보시며 광구천하의 큰뜻을 정하시다
24세 되시던 갑오년에 태인 동골 사람 전봉준이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동학신도들을 모아 혁명을 일으키니 온 조선 천지가 들끓었다. 하지만 혁명은 30만 명이 넘는 농민이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며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그후 세상 인심은 날로 악화되고 관리들은 더욱 포악해져 백성은 고난과 궁핍 속에서 안도할 길을 얻지 못해 불안과 두려움이 온 사회에 가득했다.
증산 상제님은 실패로 돌아가는 동학혁명을 지켜보시며 동서양의 온 천하가 날로 그릇됨을 깊이 근심하시고, 의연히 세계 인류를 건지시려는 광구창생의 큰 뜻을 구체화하기 시작하셨다.
3년 동안 천하를 유력하시며 만상을 둘러보시다
27세 되던 정유(도기27, 1897)년에 이르러 광구천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먼저 유불선 음양참위를 비롯한 모든 글을 읽으시고 “이것이 천하를 광구하는데 일조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세태와 인정을 체험하기 위해 이 해 가을 천하 유력의 길을 떠나신다.
이로부터 상제님은 온 몸으로 세상 인민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시니 맨발로 먼 길을 걸으시고, 풀밭에서 노숙하시고, 인가에서 걸식하시고, 굶기도 자주 하시며 몸소 세상 만상(萬相)을 둘러보고, 인간의 온갖 고통을 둘러보셨다.
유력하시던 어느 날 개울가를 지나다, 배가 고파 개울가에서 드러누워 있는 어느 부녀를 보셨다. 딸이 물새우를 잡아 아비의 입에 넣어주니 그 아비는 다시 꺼내 딸의 입에 넣어주고 있었다. 상제님께서 그 광경을 애처로이 바라보며 슬픈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어서 베풀어 저런 불쌍한 창생들을 살려야 하리라. 저렇게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널리 구하리라.”
이렇게 수년동안 돌아다니며 민심과 풍속을 살피고 명산대천을 관찰한 뒤 30세 되던 해에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객망리 본댁에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공명첩과 교지를 불사르며 만류하는 부모와 친족들에게 “모든 것이 나로부터 새롭게 된다”고 선언하셨다.
1901년, 31세에 중통인의(中通人義)의 도를 이루시고 천지대신문을 여시다
31세 되던 신축(道紀31, 1901)년에 이르러 “이제 천하의 대세가 종전의 알며 행한 모든 법술로는 세상을 건질 수 없다”고 생각하시고 비로소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조화권능이 아니고서는 광구천하의 뜻을 이루지 못할 줄을 깨달으시고 수도에 더욱 정진하셨다. 6월초 마을 뒷산 시루산에 올라가 14일 동안 수도하시고 6월 16일 다시 전주 모악산 대원사 칠성각으로 가서 도를 닦으셨다. 이때 대원사 주지 박금곡(朴錦谷)이 상제님을 천신(天神)으로 대접하고 공경하며 모셨다.
대원사에서 수도하신 지 스무 하루 만인 음력 7월 7일, 천둥과 지진이 크게 일어나고 상서로운 큰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모든 마(魔)를 굴복시키고 중통인의의 도를 이루셨다. 이로부터 삼계대권을 주재하는 인존천주님의 자리에서 천지대신문을 여시고 우주의 조화권능을 뜻대로 행하기 시작하셨다.
후천 오만년의 새 천지질서를 짜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시고(1901~1909) 천상의 보좌로 어천하시다
상제님은 31세 되시던 신축(辛丑, 1901)년부터 39세 되시던 기유(己酉, 1909)년까지 9년 동안, 선천 상극의 운을 끝막고, 후천 상생의 새 천지를 개창하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집행하셨다.
천지공사란 선천 5만년 역사를 심판하고, 가을 개벽기에 인류를 구원하여 후천 5만년 새 천지를 창조하는, 인간으로 강세하신 상제님의 인간과 신명 구원의 대 성업(聖業)이다. 증산 상제님의 모든 진리는 천지공사로 통한다. 이는 상제님 지상강세의 목적이 천지공사를 집행하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보는 일이 한 나라의 일에 그칠진대 어렵지 않지마는 천하사(天下事)인 고로 이렇듯 더디노라.” 하시니라. (道典 5:321:1)
이제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쳐 물샐틈없이 도수를 짜 놓았으니 제 한도(限度)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道典 5:320:1~9)
상제님이 인간의 몸으로 계시던 당시 인존 상제님을 추종하는 영광을 입어 천지공사에 수종들은 지상의 성도(聖徒)들은 수십 명에 이르며, 불치의 병고침을 비롯한 인생사의 크고 작은 고통을 끌러내는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부지기수였다.
선천 상극의 우주를 후천 상생의 새 천지로 돌려놓으시는 천지공사는 인간으로 강세하신 상제님의 인류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봉사와 대속의 삶 속에서 이루어졌다. 상제님은 1909년 음력 6월 24일 천지공사를 마치시고 다시 천상의 보좌로 어천(御天)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