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국제학술회의서 연구논문 발표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광개토대왕의 생전의 정식 명칭은 '영락태왕'이었다."
"광개토대왕 재위 당시 중국과 동북아시아에는 수많은 나라가 공존하고 있었고 서로 빈번하게 왕래하면서 문화적으로 아주 풍성하고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광개토대왕은 외교전략을 통해 고구려 전성기의 기초를 구축할 수 있었다."
광개토왕 서거 1천600주년을 맞아 오는 16-17일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는 국제학술회의에서 외국 학자들이 발표할 연구 논문의 주요 내용이다.
중국, 대만, 일본 세 나라의 주요 학자들은 '고구려 광개토왕과 동아시아'를 주제로 한 이번 국제학술회의에서 광개토왕과 고구려사를 다각도로 조명할 예정이다.
외국학자들의 연구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중국 베이징대 중국고대사 연구중심(센터) 뤄신(羅新) 교수 = 그는 '고구려 왕호제도(王號制度)에 관한 몇 가지 견해'라는 제목의 발제문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 문헌자료와 광개토대왕비를 토대로 고구려의 왕호제도를 분석했다.
뤄 교수에 따르면 고구려 왕족과 지배층이 사용한 언어는 고대 만주-퉁구스어에 비교적 가까우며, 알타이(Altaic) 언어 범주에 속해 있거나 그와 인접해 있다.
뤄 교수는 "알타이 계통의 전통적인 정치명호(政治名號)는 이름(王名)과 칭호(官稱.title)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면서 고구려는 최고지도자를 알타이 계통에서 수령을 뜻하는 '가(aka/akan)'로 칭했고, 후한(後漢) 중후기부터 중국식 명칭인 '왕'을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또 광개토왕의 연호로 알려진 영락(永樂)은 광개토대왕 생전의 왕명이었으며 태왕(太王)은 칭호였다고 주장했다. "광개토왕이 즉위할 때 '영락태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영락태왕'은 생전의 정식 칭호였다"는 것이다.
뤄 교수는 또 광개토왕처럼 고구려 왕들은 생전에 각기 왕명이 있었고, 고구려 고유 언어로 불렸는데 이를 한문으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명칭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했다. 사후 시호(諡號) 역시 모두 고구려 언어로 불렸으며 이후 한문으로 기록됐다고 분석했다.
◇리밍런(李明仁) 대만 국립 자이(嘉義)대 교수 = 리 교수는 문화교류라는 측면을 광개토대왕 재위 전후의 동북아시아 역사를 조명했다.
그는 중국 중심의 '중화사상'의 개념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문화인류학의 문화접변(culture acculturation) 개념을 도입했다.
리 교수는 광개토왕 재위 전후 당시의 국제정세를 '세력균형'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중국의 중원과 동북아시아의 많은 나라가 병렬적으로 공존하고 서로 빈번하게 왕래하면서 문화적으로 풍성한 발전을 이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리 교수는 특히 고고학 발굴 자료나 문헌 자료를 중국 문화(漢文化)의 영향 등 자문화 중심주의적 시각에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고고학의 발굴 결과는 파편적이고 우연적인 요소가 전반적으로 그 시대의 문화교류상을 그려낼 수 없다"면서 "고고학 자료에만 의지하고 문화교류를 해석할 때 지극히 제한된 일부를 전체로 잘못 보고 자기 입장에서 자기 소리만 말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민족주의적, 자문화중심적인 역사 해석을 경계했다.
또 "고대 광개토왕 시대의 고구려 문화를 연구할 때 과거의 어떤 전통적인 생각의 굴레를 벗고 그 시대의 역사적 사상을 깊이 고려해야 하고 현대인의 관념을 덧칠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 교수는 또 중원에 존재한 고구려 성씨들인 여(餘)·고(高)·왕(王)씨, 후연(後燕)과 북연(北燕) 등의 왕조에서 활약한 부여 왕자 여울(餘蔚), 고구려계 모용운(慕容雲.高雲) 등도 새롭게 조명했다.
◇이노우에 아오키(井上直樹) 일본 교토부립대 교수 = 이노우에 교수는 '광개토왕의 대외관계와 영락 5년 대 거란전(對契丹戰)'이라는 제목의 발제문에서 대 거란전을 중심으로 광개토왕의 대외 전략을 살펴봤다.
그는 광개토왕이 거란의 한 갈래인 패려(稗麗)와 전쟁을 벌인 것은 남방 세력인 백제 등과의 전투에 앞서 배후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광개토왕이 남방의 백제와 군사적으로 심각한 긴장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대(對) 남방전보다 먼저 패려 토벌을 결행했던 이유는 광개토왕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라면서 "대 패려전은 광개토왕이 행한 대외전략 전체 틀 안에서 자리매김시켜 종합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광개토대왕의 남방 정책은 서북 변경의 동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백제와의 군사적 대립이 고조돼 남방에 대한 전략을 결행하는 데 서북 변경의 정세를 경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노우에 교수는 또 "고구려는 자국의 서북쪽과 남쪽, 두 가지 방면에서 전투하는 것을 피하고자 했는데 신라, 백제와 대립이 격화됨에 따라 적극적으로 대(對) 북위 외교를 전개했다"면서 "고구려는 이러한 외교전략을 통해 광개토왕이 고구려 전성기의 기초를 구축할 수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yunzhen@yna.co.kr
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3&cid=307092&iid=13972995&oid=001&aid=0005511479&ptype=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