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여는 비록 고조선을 계승하였지만, 고조선의 전 영역을 흡수하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열국列國의 분열시대가 시작되어 고조선의 옛 영토에는 북부여, 동부여, 서부여, 낙랑국, 남삼한, 옥저, 동예 등의 여러 나라가 형성되었다. 열국시대는 그 후 사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거쳐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로 변화하였다.
그렇다면 북부여의 국통은 어디로 계승되었는가?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로 계승되었다. 북부여의 고무서단군은 자신을“ 천제의 아들(天帝子)”이라고 밝히는 주몽을 범상치 않은 인물로 여겨 둘째 딸인 소서노를 주어 사위로 삼았다. 아들이 없던 단군은 재위 2년 만에 붕어하면서 그에게 대통을 물려주었다(BCE 58). 고주몽이 북부여의 7세 단군이 된 것이다.
주몽은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4대손으로,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 고진의 손자인 불리지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화부인이 나들이를 나왔다가 불리지와 정을 통하게 되었는데, 그 후 임신한 사실이 발각되어 집에서 쫓겨나 송화강 강가에 감금되었다. 그때 동부여의 왕 해부루가 순행을 나왔다가 유화를 발견하고는 왕궁으로 데리고 갔다. 그 왕궁에서 주몽이 태어났다. 주몽은 부여어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뜻한다. 그런데 동부여 사람들이 시기하여 해치려고 하자, 주몽은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제 고향인 북부여를 찾아가 단군으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고구려로 바꾸었다(BCE 37).
고구려의 등장은 북부여 이래 열국시대의 혼란상을 극복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고구려 3세 대무신열제는 동부여왕 대소를 물리쳐서(CE 22) 동부여를 고구려에 귀속시키고, 이어서 최숭의 낙랑국을 병합하였다(CE 37). 대무신열제의 아들 호동왕자가 낙랑국의 공주로 하여금 자명고를 찢어 버리게 한 유명한 사랑 이야기가 바로 이때의 사건이다. 그리고 동부여 유민들이 세운 갈사부여, 연나부부여도 결국 고구려에 항복하거나 편입되었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의 열국을 모두 통합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배운 고구려 역사(BCE 37~CE 668)는 건국에서 패망까지 700년이 조금 넘는다. 그런데 중국 사서『 신당서』를 보면, 당의 시어사侍御史 가언충이 요동에서 돌아와 전황을 보고하는 중에“ 『고려비기』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9백 년을 넘지 못하고 팔십 먹은 당의 장수에게 망한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하는 구절이 나온다. 어떻게 해서 고구려 역년이 900년이 되는 것인가?‘ 고주몽이 해모수를 태조로하여 제사를 모셨다[祠解慕漱 爲太祖]’는『 삼성기 상』의 기록에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운 때(BCE 239)부터 계산하면 900년이 약간 넘는다.
고구려는 북부여의 연장선상에 있는 나라이므로, 북부여가 원고구려라 할 수 있다. 고구려가 망하고 대중상이 세운 대진국도 처음에는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였다. 원고구려-고구려-후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는 우리 국통 맥을 잇는 결정적 요소 중의 하나이다.
한반도 북쪽의 역사가 이와 같이 진행되는 동안에, 남삼한에 형성되었던 소국가 연맹체는 백제, 신라, 가야로 계승되었다. 고주몽과 소서노 사이에 태어난 두 아들 중 온조가 마한 땅에 백제를 세운(CE 18) 후 마한의 소국가들을 모두 통합하였다. 진한은 신라로 발전하였으니, 고두막한의 딸이 낳은 박혁거세가 진한 땅에 사로국을 세워 점차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한 결과였다. 그리고 변한은 6가야 연맹체로 발전하였다. 백제와 신라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의 후손이 일군 역사인 것이다.
(원문: 상생출판 환단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