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의 천자 나라로 발전을 거듭하던 고조선은 21세 소태단군 말기 무렵, 개국 이후 첫 번째 국가 위기상황을 맞이하였다. 국가 운영의 근간인 삼한관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상나라 정벌에 공을 세운 개사원 지역의 욕살褥薩(지방장관) 고등高登과 해성 욕살 서우여徐于餘의 권력투쟁이 그 발단이었다. 순행 길에 옥좌 이양 의사를 밝힌 단군은 서우여에게 제위를 넘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등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보위에 오르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색불루에게 국새를 넘겨주었다. 이에 서우여가 마한, 번한의 군대와 연합하여 색불루에게 강력히 저항하면서 삼한의 군대가 서로 싸우는 내전이 발발하였다. 다행히 두 사람 사이에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져서 내전은 가까스로 종결되었지만, 자칫 삼한관경제가 붕괴될 수 있는 위기를 겪었다.
정권을 탈취한 22세 색불루단군은 백악산 아사달로 천도하여 고조선의 제2왕조시대를 열고 국정쇄신을 위해 삼한(진한, 번한, 마한)을 삼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꾸었다. 삼조선 체제에서도 여전히 진조선만 병권을 가졌지만, 이미 예전의 삼한관경제가 아니었다.
22세 단군은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8조금법을 제정하였다. 8조금법은 여덟 가지 죄의 종류와 각 죄에 대한 처벌을 정한 삼성조 시대 최초의 성문법이다. 법규의 제정은 강력한 통치 체계를 갖춘 고대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고조선의 사회 분위기와 경제 질서가 그만큼 어수선해졌음을 나타낸다. 당시 고조선은 신교 문화의 성소聖所인 소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의식이 약해지고 빈부 격차와 계급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43세 물리단군 때에 이르러 삼한관경제가 완전히 붕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냥꾼 우화충于和沖의 역모 사건이다. 장군을 자칭한 우화충이 무리를 이끌고 도성까지 공격해 오자, 피난에 나선 단군은 도중에 붕어하고 말았다. 이때 반란군을 평정하기 위해 욕살 구물丘勿이 장당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구물은 도성에 큰물이 들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반란군을 평정하고 44세 단군으로 즉위하였다. 장당경 아사달에서 고조선의 제3왕조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구물단군은 국력 회복을 위해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로 바꾸었다. 또 천제를 올려 삼신상제님의 보살핌을 간절히 하소연하였다. 제도를 고치고, 아홉 가지의 맹세(九誓之盟)를 정하여 백성들의 화합과 교화도 도모하였다. 하지만 대부여는 예전의 진한 또는 진조선과 같은 막강한 통치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부단군이 다스리는 두조선도 병권을 가지게 되어, 쇠약해진 진조선과 대등한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약 2천 년 동안 고조선을 지탱하던 삼한관경제는 거의 와해 직전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고조선은 급속하게 쇠락의 길을 걸었다. 45세 여루단군 이후 고조선과 국경을 접한 연나라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고, 46세 보을단군 때는 번조선 왕해인解仁이 연나라 자객에게 시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보을단군의 보위를 탐하는 내란까지 발생하였다. 한개韓介가 수유의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점령,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이때 장군 고열가高列加가 내란을 진압하고 추대를 받아 즉위하니, 이분이 바로 마지막 47세 단군이다.
하지만 고열가단군은 우유부단하였고, 장수들의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BCE 238년, 마침내 단군이 오가에게 새로운 단군을 천거할 것을 부탁하고 산으로 들어가 버리니, 고조선은 2,096년으로 그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고조선 역사 2,096년은 고조선의 중심 세력인 진조선의 역사라는 것이다. 고열가단군은 퇴위하였지만, 고조선 전체가 한꺼번에 문을 닫은 것이 아니다. 번조선은 그 이후 40여 년을 더 존속하였다. 고조선 망국의 과정은 삼신 문화에 바탕을 둔 고조선의 국가경영체제를 모르면 그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원문: 상생출판 환단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