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타이 왕국의 흥망성쇠
김현일 (상생문화여구소 연구원)
고대의 유목민하면 얼핏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흉노와 스키타이이다. 흉노는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 〈흉노전〉이라는 장이 따로 있을 정도로 한나라 때 중요한 역할을 한 북방유목민이었다.
흉노가 중국사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직후였다. BCE 3세기 말의 일이다. 한나라가 건국되었을 때 흉노도 강력한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그 후 흉노는 한나라의 골칫거리가 되어 한나라는 오랫동안 흉노와 사생결단의 전쟁을 치러야 하였다. 한무제 때 흉노를 정벌하기는 하였지만 그 후 흉노의 일부는 서역으로 달아나고 일부는 중국 내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이것이 남흉노이다.
남흉노는 중국의 번병 노릇을 하였지만 중국의 내부 사정이 혼란에 빠지면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기도 하였다. 위진남북조 시대가 그런 시대였다. (221-589) 로마제국 말기에 동서 로마 제국을 쥐었다 폈다 한 훈족도 유럽으로 서진한 흉노의 후예였다. 그런데 이 흉노보다 더 앞선 시기에 남러시아 초원지대로부터 알타이 산맥에 이르는 유라시아의 광대한 스텝 지역을 주름잡았던 유목민족이 있다. 바로 스키타이족이다.
스키타이는 원래 아시아 초원지대에 살았다. 알타이 지역에서도 그 흔적이 나타난다. 아시아 초원지대에 살던 스키타이의 일부가 BCE 7세기에 유럽으로 이동하였다. 기후변화로 추정되지만 서진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져 있지 않다.
스키타이는 카프카즈 산맥 북안과 흑해 북안의 초원 지대 즉 오늘날 남러시아에 도달하였다. 이들은 그곳에 머물지 않고 BCE 670년대에 곧 카프카즈 산맥 남쪽으로 진출하였다. 카프카즈 산맥 남쪽은 오늘날 이란과 터키 등이 있는 서아시아 땅이다.
이들이 왜 남쪽의 서아시아로 진출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훌륭한 초원이 있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였을까? 좌우간 이들은 아제르바이잔 초원지대를 근거지로 삼아 나라를 세웠는데 러시아의 저명한 유목민사 전문가 아나톨리 하자노프 교수에 의하면 이 나라가 스키타이 최초의 나라였다고 한다.
서양 역사학의 비조에 해당하는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에는 스키타이가 상부 아시아를 28년 동안 지배하였다고 여러 곳에서 언급되어 있다. 이는 스키타이가 아제르바이잔 지역으로부터 남쪽으로 그 세력을 크게 확대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스키타이 무사들의 전투 장면을 새긴 금제 빗(기원 전 4세기).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스키타이는 메디아인들과 싸워 메디아 왕국을 해체시켜 버렸다고 한다. 스키타이가 아시아 전체를 지배하였다는 그의 말이 맞는 것인지 모르지만 스키타이의 지배 영역은 소아시아로부터 시리아 지역까지 걸쳤던 것은 확실하다.
BCE 630년경에는 아시리아 제국의 동맹국이었던 이집트를 정벌하러 갔으나 이집트 왕 프삼메티코스가 선물을 바치고 애원하는 바람에 스키타이가 회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회군하는 길에 시리아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약탈하였다. 당시 팔레스타인 해안지역을 차지하여 살던 블레셋인들의 도시 아스칼론 시에 있던 아프로디테 우라니아 여신의 신전이 약탈되었다고 하는데 아프로디테 우라노스는 이 지역에서 널리 숭배되던 아스타르테 여신을 말한다.
스키타이인들 가운데서 일부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주 눌러앉았다. 갈릴리 호수 남쪽에 있던 로마 시대의 스키토폴리스라는 도시는 ‘스키타이의 도시’라는 뜻이다. (신약성서에도 그 이름이 나온다) 이는 이 지역에 정착한 스키타이인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헤로도토스의 말에 의하면 중동의 지배자가 된 스키타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였을 뿐 아니라 말을 타고 다니며 마음 내키는 대로 재물을 빼앗아 갔다고 한다. 이 때문에 견디다 못한 메디아인들이 봉기하여 스키타이의 우두머리들을 죽이고 스키타이를 내쫓아버렸다.
BCE 614년 메디아의 키악사레스 왕에게 패한 스키타이는 다시 카프카즈 산맥 너머의 북쪽 초원으로 돌아갔다. 현재 카프카즈 북부의 쿠반 강 주변에 남아 있는 여러 쿠르간들에서 매우 화려한 부장품들이 다수 발굴되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중동 지역에서 생산된 유물들이 많다. 아마 아시아에서 퇴각할 때 가져간 물건들이었을 것이다.
카프카즈 북쪽 초원지대로 돌아온 스키타이는 흑해 북안의 드네프르 강 중류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하자노프 교수에 의하면 BCE 6세기는 이 스키타이의 전성기였다고 하는데 이들은 오늘날의 슬로바키아, 폴란드 등 중부 유럽 지역까지 멀리 진출하였다. 물론 땅을 정복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재물을 빼앗기 위한 유목민들의 전형적인 약탈원정이었다.
BCE 514년에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이 무려 70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스키타이를 침공하였다. 헤로도토스의 말에 따르면 인구가 늘고 세수가 증대하자 힘이 강해진 페르시아가 메디아의 복수를 하기 위해 스키타이를 공격한 것이라 한다.
좌우간 다리우스 대왕이 동원한 페르시아 군은 소아시아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유럽으로 들어갔다. 페르시아 군은 헤로도토스가 세계에서 제일 큰 강이라고 한 이스트로스 강(다뉴브 강)을 건너 스키티아로 쳐들어갔으나 스키타이 군과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
유목민인 스키타이의 기마부대는 정면대결을 피하고 적을 초원 깊숙이 끌어들였다. 도시와 인가가 없는 광활한 초원지대에서 식량과 식수를 확보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보급선과 퇴각로에 대한 걱정으로 다리우스는 결국 철수하기로 하였다. 페르시아는 엄청난 군대를 이끌고 스키타이로 쳐들어갔지만 헛발질만 한 셈이었다. 페르시아 군대가 물러난 후 스키타이 세력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영화 <스키타이: 불멸의 전사> 2018 ・ 액션 ・ 러시아
흑해 북안에 정착한 스키타이인들은 흑해 연안의 그리스 도시들과 활발한 교역을 벌였다. 높은 문화수준을 가진 그리스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스키타이 사회는 큰 영향을 받았다.
스키타이 귀족들의 생활은 엄청나게 사치스러워졌다. 암포라(항아리)를 비롯하여 그리스에서 생산된 값비싼 공예품들이 수입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산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도 대거 수입되었다.
특히 그리스 포도주는 스키타이 귀족들에게 아주 인기가 높았다. 당시 왕족과 귀족들 무덤의 부장품 가운데 절반은 그리스 물품이었다. 그리스인들의 영향으로 귀족들은 그리스식으로 집을 짓고 살았다.
스키타이인들 가운데 그리스인들이 필요로 하는 곡물을 재배하기 위해 정착농업을 영위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정주화와 도시화로 요약되는 스키타이 사회의 변화는 장기적으로 스키타이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스키타이족이 알타이산맥 동쪽인 러시아 투바공화국 지역에 남긴 칭게테이 쿠르간
BCE 4세기에는 스키타이는 이번에는 발칸 반도로 진출하였다. 당시 그리스 북부에서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급속히 흥기하고 있었다.
로마의 유스티누스(영어로는 ‘Justin’)라는 역사가가 쓴 책이 있다. 이 사람이 언제 때 사람이고 어디에 살았던 사람인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2세기에서 4세기 사이의 사람으로 추정되는데 라틴어로 씌어진 《필립포스의 역사》를 남겼다. 원래는 폼페이우스 트로구스라는 사람이 로마인들을 위하여 쓴 그리스 역사를 요약한 것이라 한다.
필립포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인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립포스 대왕(BCE 382-336)을 말한다. 그러나 유스티누스의 책을 보면 필립포스 왕과 그 아들 알렉산더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아시리아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알렉산더 이후의 헬레니즘 왕국들, 보스포루스 왕국, 파르티아와 로마에 관한 장들도 있어 결코 마케도니아 왕가의 역사에 그치지 않는 넓은 의미의 세계사 책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이 때문에 중세기에 널리 읽힌 역사서가 되었다.
유스티누스에 의하면 필립포스 대왕은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전쟁을 하려고 하였는데 전쟁을 위해서 돈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그리스의 부유한 도시인 비잔티움을 공격하였는데 이 도시는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고깔 모자쓴 스키타이 전사의 모습.
필립포스는 주변의 도시들과 지나가는 상선들도 약탈하였다. 심지어는 북쪽으로 스키타이 지역으로도 약탈원정을 하였다.
당시 스키타이는 아테아스라는 이름의 젊은 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 역시 주변의 히스트리아인들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아테아스도 마케도니아 왕국에 도움을 청해야 할 만큼 다급하였다. 그래서 심지어는 전쟁에서 이기면 필립포스 왕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겠다는 약속도 하였다. 그런데 히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예상과 달리 그 왕이 죽으면서 쉽게 끝나버리자 스키타이 왕은 약속을 어기고 필립포스를 후계자로 삼겠다는 약속은 말할 것도 없고 필립포스가 요청한 군자금 지원도 스키타이가 가난하다는 것을 구실로 내세워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스키타이와 마케도니아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유스티누스의 말에 따르면 스키타이인들은 수도 많고 더 용맹하였지만 필립포스의 교묘한 전략을 이길 수 없었다고 한다.
전쟁에서 진 스키타이는 2만 명에 달하는 여자와 청년, 많은 소떼, 그리고 2만 마리에 달하는 암말을 마케도니아에 전리품으로 보내야 하였다. 마케도니아의 근위기병대는 그 후 마케도니아 군의 중요한 핵심전력이 되었는데 필자는 이것이 스키타이로부터 받은 말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였지만 스키타이가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다. BCE 331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폰투스 총독 조피리온이 3만 명의 병력을 모아 스키타이를 공격하였다가 스키타이에 참패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스키타이의 쇠퇴는 그 다음 세기인 BCE 3세기에 시작되었다. 서쪽으로부터는 켈트족과 게르만족 계통인 게타이족, 동쪽으로부터는 이란계 유목민인 사르마트인들의 공격으로 스키타이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게 되었다.
하자노프 교수에 의하면 이 시기부터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인들의 고분 즉 쿠르간이 급속히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스키타이가 흑해 초원지대를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대거 이주하였음을 시사해준다.
스키타이는 다뉴브 강으로부터 돈 강에 걸친 초원지대를 버리고 좁은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겨갔다. 이들에 의해 두 개의 소규모 국가가 세워졌는데 하나는 다뉴브 하구의 도브루자 지역에, 다른 하나는 크림 반도를 중심으로 하였다.
현재의 심페르폴 근처의 네아폴리스는 바로 후자의 수도였다. 크림 반도에 정착한 스키타이는 후일 게르만족 이동기에 고트족의 공격으로 소규모 집단으로 분해되어 고트족에 동화되어 갔다. 유목민족으로서 스키타이의 문화적 특성도 이로 인하여 차츰 사라져간 것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