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문제의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몸짓과 사고와 행위를 해 왔습니다. 인생의 근본 문제의 해답을 추구하는 것을 동양에서는 이른바 道라고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보면 道可道非常道-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 하는 말이 있지만 이러한 도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수많은 종교가 있어요.
그러면 이 종교라는 것은 진리의 해답, 인생의 근본적인 해답, 우주와 인간이 근본적으로 숙명적으로 걸어 가야할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종교에 대해서 크게 두가지로 생각을 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하나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뭔가 울적하던 것이 좀 가라앉고 죄지은 것이 은근 슬쩍 없어지는 것 같고 누군가 나의 죄를 다 사해 주는것 같은 그러한 착각에 빠지는 마음의 피난처로 생각을 해요.
또 하나는 기복적인 것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길동이 엄마와 이쁜이엄마 둘다 올해 시험 보는 자식이 있는데, 길동이네는 부자기때문에 100만원을 내놨어요. 이쁜이 엄마는 너무너무 가난해서 100원밖에 내 놓지 못했어요.
부처님이 보시고 '길동이 엄마는 그래도 사람이 되었구나, 100만원 내놨으니까. 그래도 100만원은 있어야 뭐래도 사먹고 그러지'하면서 '니 아들 참 이쁘니까 대학교 붙여주마'하고
이쁜이 엄마는 적게 내었다고 안붙여 주겠습니까? 물론, 지금 말한것은 단적인 예라는것 압니다.
그리고 돈많이 벌은사람 자신이 믿는 종교단체의 발달을 위해 많이 기부하는거 좋은것입니다.
'나 잘되게 해주세요..' 하고 자기 이익 챙길려고 내는건 아니라는거죠.
하여튼, 만약 우리가 부처님이라면, 성인이라면 절에 이렇게 앉아 있는데 중생들이 와서 자기 하소연을 할 때 그러한 기준으로 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 수준으로 부처님을 내려 앉히고 자기 수준으로 에수님을 내려 앉히고 자기 수준으로 기존의 성자들을 내려 앉혀서 자기 수준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종교라는 것은 원래 그렇게 기복적인 것이나 마음의 피난처로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원래 종교라는 것은 성인들이 아주 커다란 진리의 세계를 깨닫고..
이것은 어떻게 '크다, 깊다' 말로 하기 힘들 정도로 큰 진리의 세계를 깨달은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의 세계는 아주 좁은 세계입니다.
우리가 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컴퓨터, 사랑, 생각 뭐 이렇게 말하면 다 알아 들을 수있죠. 이것은 형이상학적이건 형이하학적이건 사람이 뭔가 알아 들을 수 있고 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언어라는 것 자체가 공통의 경험의 집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인들이 깨달은 세계는 훨씬 넓고 커서 이 중생들이 쓰는 언어의 세계에는 없어요.
중생들이 살아가는 이러한 삶이 전부가 아니더라, 그래서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된다고 가르쳐야만 되겠더라는 거죠. 그러나 이 중생들이 쓰는 언어 세계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전부 다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면 비유나 상징으로써 표현했어요. 불경이나 성경, 사서삼경이나 비유나 상징으로 표현이 되어 있어요.
이러한 성인들의 큰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보통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성인들의 말씀을 유추해석을 해서 이러이러한 뜻이겠지 하다보니까 지금 종파가 무수히 나누어지게 되었어요.
종파가 우리나라만해도 3000여개의 종파가 있을정도로 완전히 종교의 숲에 묻혀 살고 있지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수많은 종교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사고가 세뇌되고 있고 자기 자신의 이념이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고 있답니다.
그럼 도는 무엇이며, 종교는 무엇이며, 철학은 무엇이며 과학은 무엇인가?
그건 이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진리의 향기 정명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