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이 한(漢)으로 넘어올 즈음, 신선술과 오행사상이 도가와 결합하면서 도교가 발생했다. 노자와 황제를 시조로 하는 도교는 수행을 통하여 몸으로 장생불사하는 것을 추구하는 신선의 도맥이다. 이들은 인간의 몰락과 세계의 종말을 대자연의 운행과정에서 일어나는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도 별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노자는 만물이 태어나는 자리인 조화정신(변화의 길)을 구태여 이름지어 부른다면 ‘도(道)’라 하고, 이 천지 조화의 근원을 종종 ‘무(無)’라는 말로도 표현하고 있다.

즉, 천지만물은 이 무(無)의 경계에서 태어났고, 또 만물은 무(無)에서 열린 천지의 근본자리(1태극)에서 화생된다. 무(無)는 우주의 근원이 되는 극치의 조화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만물을 생성하는 생명의 근원이 바로 이 무의 조화세계인데, 장자가 그랬듯이 도가에서는 자주 혼돈(混沌)이라는 말로 무(無)의 창조성을 상징한다.

우주 혹은 우주의 질서를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Cosmos, 질서, 태극)’라는 말은 ‘카오스(Chaos, 혼돈, 무극)’에서 비롯된 것이다―이런 것을 보면 동서양 모두가 우주의 근원에 대한 인식이 놀라우리만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에 시작이 있으니 천하의 어머니가 된다. 어머니를 알기에 그 아들도 알게 되네. 아들을 알고서 또 어머니를 지킨다면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으리라."<道德經 52장>

  그러면 우리가 사는 현상계는 천지의 근원적 조화세계[無]로부터 어떠한 생성단계를 거쳐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 『도덕경』 42장을 보면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간단 명료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도(道)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음양)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업고 양을 안고
텅 빈 가운데 기를 휘저어 조화를 이룬다.
<道德經 42장>

  여기서 변화의 질서인 도(道)는 무(無) 또는 무극(無極)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 조화세계의 경계를 흔히 텅빔, 즉 ‘허(虛)’라는 다른 말로 나타낸다. 이는 천지와 천상의 신명계, 우리 인류가 태초에 생겨나기 전의 바탕자리이다.

 그런데 이 허(虛)하고 무(無)한 천지 조화의 극치경계[無極]는 그 자체에 내재된 자연이법[理]의 역동적인 생명력으로 인해 스스로 발동(動)한다. 그리하여 무극의 혼돈 속에서 통일의 조화체인 ‘태극수(太極水)’가 화하면서 변화의 질서(음양)가 열려 창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우주의 조화 생명수로부터 음양[坎離]운동이 일어나고, 이 음양 두 기운[水·火]은 태극수가 생성된 바탕인 중성생명[沖氣]의 조화작용으로 인해 무궁한 변화를 일으킨다. 천지가 변화를 영원히 지속할 수 있는 것도 일음일양(一陰一陽) 운동을 끊임없이 지속하게 하는 중(中)의조화작용 때문이다.

앞의 내용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주가 만물을 낳을 때 삼단계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또한 열린 이 우주세계가 변화의 성숙(통일)운동을 하는 전과정도 3단계의 변화과정을 통해 성립된다는 것이다.

둘째, 우주자체의 조화성(調和性)인 중성생명[土氣]이 대자연의 변화를 끌고 가는 조화의 중추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도의 운동이 직선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변화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가 시간대의 일정한 변화주기를 가지고 순환하며 복귀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순환하여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창조운동이다." <道德經 40장>

"모든 것을 비우고 마음을 고요히 가져라. 만물이 생기고 없어지는데 나는 그것이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지켜볼 뿐.

그들은 자라고 자라서 각기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 하느님은 바로 도이며 도는 영원하니 몸은 죽더라도 도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道德經 16장>

  인간은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영원한 삶의 길은 무엇인가? 그 관건은 천지의 도와 덕에 합치되는 삶을 사는 것에 있다. 노자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은 대국적인 우주의 변화문제를 풀 수 있는 만고의 법언이 될 것이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길(道)을 본받고
길은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道德經 25장>

  여기서 ‘도법자연(道法自然)’의 뜻은, 우주변화의 원리가 ‘스스로 그러함’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인간 역시 스스로 그러한 천지의 창조법도를 따라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에는 곧, 천지가 걸어가는 변화의 길[道]은 스스로 그렇게만 돌아가는 우주자연의 질서[理]에 그대로 잠겨 있으므로, 인류의 미래 운명을 알려면 우주변화의 원리[道]를 인식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데 노장(老莊)의 가르침에서는 스스로 그러한[自然之道: 無爲] 우주의 자연적 변화질서를 따르는 삶의 길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우주질서의 주재자에 대해서는 희미하게 한두 마디 정도의 언급만 하고 있을 뿐이다.

  즉, 우주의 질서 도(道: 변화의 길)와, 그 질서를 개벽해 모든 생명을 새 세계로 인도해 주시는 도의 주재자(主宰者: 綜理其事者)와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전해 주지 못했던 것이다.

"도는 비어있음으로 가득하니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도다.
그윽하여라! 온갖 것의 으뜸 같도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얽힘을 푸는구나.
그 빛이 튀쳐남이 없게 하고 그 티끌을 고르게 하는도다.
맑고 맑구나! 있는 것 같도다!
나는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모르네.
상제님보다도 앞서 있는 것 같네."
  <道德經 4장>

  후대에 도교의 우주론이 정립되면서, 우주에는 동서남북 사방위(四方位)에 각각 팔천(八天)이 열려 있어 도합 32천의 세계가 벌여져 있다고 여겨져왔다.  

도가의 경전인『도장(道藏)』에서는 36천을 말하기도 한다.이 32천의 대우주를 주재하는 하느님이 바로 옥황상제(玉皇上帝)님이다.

  이것은 우주의 실상을 보는 안목에 있어서 기독교의 창조신관과는 큰 차이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주관은 이제까지는 대우주의 신도(神道)세계가 다천(多天)의 복수세계로 열려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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