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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산도 도전9: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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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시원문화 환단고기 북콘서트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4편>

                                  국내성 천도, 그리고 부여 정벌

 

 

                                                                                         극본-이상락  연출-이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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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그널 + 타이틀

<효과>  (개업하는 집 고사 지내는-사람들 웅성)

 

남자1   아이고, 그 돼지 머리 한 번 탐스럽게 생겼다. 아, 잠깐, 절하기 전에 막걸리부터

           따라 올려야지. 고사 한두 번 지내보나.

 

<효과>  (막걸리 따르는)

 

남자2    자, 이 술 받으시고…(엎드려 절하며) 우리 친구 놈 가게에 돈벼락좀 내려 주십시오.

남자들  (웅성거리며)"야, 돼지 웃고 있는 것 봐라" "절 한 번 더 해야지"   "맞어, 두 번 하는

            거야" 등

남자1   어어? 그냥 나오면 어떡해. 고삿상에 돈을 올려야지.

남자2   알았어. 내면 되잖아.

남자1   애걔걔, 쩨쩨하게 천원짜리가 뭐야. 돼지 입에 시퍼런 거 한 장은 물려 줘야지.

남자2   알았어, 알았어. (돈 구기고)만원짜리 지폐 요놈을 똘똘 말아서 도야지 콧구멍에다

           그냥 탁 찔러 줄 테니까.

 

<효과>  (사람들 웃음)

<해설>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의 김연갑입니다.

            앞에서 고사 지내는 장면을 잠깐 소개해 드렸습니다만, 첨단 디지털 시대라는

            요즘에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아닙니까.

           옛날 유대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씻는 속죄일에, 양 한 마리에다 사람의 죄를

           씌워서 황야로 내쫓았다는데요, 여기서 생긴 말이 희생양 혹은 속죄양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고삿상 혹은 제사상에 돼지를 올렸던 풍습은 언제부터 시작

          됐을까요?

         옛날 고대국가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 제천행사를 부여의 경우는 영고,

         동예는 무천, 고구려는 동맹이라 한다, 중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배운 내용이지요?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편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낭독자(F) 고구려 백성들은 노래와 춤추는 것을 좋아하며 나라의 읍락에서는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노래하고 춤을 춘다.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나라의

          큰 모임인데 이를 동명이라 한다.

<해설> 나라에서 지내는 이 제사의 이름을 동맹이라고도 하고 동명이라고도 했는데요,

            하늘, 즉 천신(天神)과 시조인 동명성왕을 함께 기리는 제례행사였습니다. 이

            제사에 제물로 꼭 필요한 것이 돼지였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아예 제수용 돼지를

            관리하는 사람을 따로 두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유리왕 19년 8월에, 제사 때

            쓸 그 돼지가 우리를 뛰쳐나가 도망친 사건이 발생합니다.

 

유리왕  무엇이라고? 제사가 두 달밖에 안 남았는데,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돼지가 도망을

            쳤단 말인가. 탁리와 사비는 당장 가서 도망친 돼지를 잡아오도록 하라!

 

두사람  "예, 대왕마마-!"

 

<효과>  (후다닥 달려나가는)

<해설>  그래서 왕의 명을 받은 탁리와 사비는 도망친 돼지를 추격해서 결국 붙잡게

             됩니다.

<효과>  (돼지, 비명 지르는)BG

 

탁리     (숨 할딱이며)아이고 겨우 붙잡았네. 가만 있어, 이놈아!

 

사비    잡아다놓으면 또 도망칠지 모르는데…도망 못 가게 하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탁리    좋은 수가 있어. 돼지 다리의 힘줄을 끊어버리자고.

 

사비    아, 그게 좋겠어.

 

<해설>  그랬는데, 그 소식이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유리왕  뭐라고? 제사에 쓰일 희생물에 상처를 냈단 말이냐? 여봐라, 저 두 놈을 흙구덩이

            를 파고 생매장해버리거라!

 

<해설>  그 대목을 삼국사기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낭독자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났다. 왕은 탁리와 사비를 시켜 잡아오게 하였다. 그들은

            장옥 늪에 이르러 돼지를 발견하고 칼로 다리의 힘줄을 잘랐다. 왕이 이를 두고

            노하여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죽였다. 9월에 왕이 병이 들었다. 무당이,

            탁리와 사비의 귀신이 화근이라고 말하므로, 왕이 그들의 원혼을 풀어주게 했다.

            곧 왕의 병이 나았다.

<해설>  그런데, 이태 뒤인 유리왕 21년 3월에 또 한 번 제사의 희생물로 쓸 돼지의 탈출

            사건이 벌어집니다.

<효과>  (돼지, 꿀꿀대며 도망치고)

 

설지    (숨 헐떡거리고 쫓아가며)아이고, 요놈의 돼지가 어디까지 도망을  칠 셈이야.

 

<해설>  돼지 관리를 책임 맡았던 설지라는 사람은 국내지방의 위나암까지 쫓아가서

            간신히 그 돼지를 붙잡습니다. 그런데 설지가 보기에 그곳의 지세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설지     대왕마마, 제가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까지 갔었는데, 그 곳 자연이 험준하고

           토양은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며, 또한 산짐승과 물고기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사옵니다. 대왕께서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긴다면, 백성들이 살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옵니다.

 

<해설>  설지의 얘기를 들은 유리왕은 그 해 9월에 직접 국내 지역에 가서 지세를 살피고

            돌아온 다음, 이듬해 겨울, 그러니까 유리왕 22년,서기 3년 10월에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삼국시기에 수도를 옮기게 된 과정을 제수용 돼지를 등장시켜서 설화풍으로

             기록한 것은 국내성 천도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이는데요, 그러나,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 시기를 놓고, 학계에서는 유리왕 때 천도를

             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학설을 내놓고 있습니다. 한신대

             임기환 교수와 동국대 윤명철 교수의 얘기를 차례로 들어보시죠.

 

*인서트-1. 테입<4>  25분 20초 이후 부근

(삼국사기를 보면 졸본이라는 지역에 아주 잠깐 있는 거고 국내로 옮기게 되는 거기 때문

에, 삼국사기 자체 기사로 본다면 그걸 딱히 정치적 갈등 이런 걸로 얘기하기는 어렵습니

다.  다만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옮긴 때가 과연 유리왕 때가 맞느냐. 삼국사기 기록이 맞

느냐.  그거와 달리 중국측 기록을 이용해 가지고, 나중에 산상왕 때다.  이렇게 하는 주장

도 있죠.  뒷 시기에 국내성으로 옮겼다고 본다면 그 문제는 상당히 정치적인 배경을 갖게

됩니다.  현재로서는 유리왕 때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태조왕, 아까 왕의 계통이 뭔가 조금

바뀔 것 같던 이미지를 주는 태조왕 때 정도는 이미 국내성으로 천도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인서트-2. 테입<5>

(01:13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일단 계기가 된 것은 제사용 돼지가 도망간 걸 찾다보니까

국내라는 지역을 발견하고 그 지역을 보니까 거기는 깊고 그 다음에 어별이를테면 물고기

와 이런 걸 잡을 수 있고 사람들 살아가는 데 이익이 되는 게 많다는, 그런 것 때문에 수도를

옮겼다고 하는데 이런 것들은 하나의 계기가 될 뿐이고 정말 수도를 옮기는 것은 중요하

거든요. 국가 정책이 바뀌는 것이고 국가의 중심지가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발전

전략이라든가 아니면 나아가서는 동아시아 국제 전략이라는 입장에서 수도가 천도되는

것이지요. 01:51

<해설>  그러나, 유리왕 때 수도를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틀린 것으로 간주해 버리면,

그와 연관된 다른 내용들도 부정해야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해서 얘기를 전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삼국사기에 의하면, 유리왕이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긴 직후 내부에서 상당한

            분열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낭독자  (F)유리왕 22년 10월,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12월, 왕이

            질산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닷새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대보 협보가

           말했다.

 

협보    대왕께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응당 나라의 안정과 백성의 구휼 사업을 돌보아야 할 것인데, 이러한 일을 생각

          하지 않고, 말을 타고 사냥을 떠나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대왕께서 만일

          이러한 잘못을 고쳐서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황폐하고 백성들은

          흩어져서 선왕의 업적이 사라지지 않을까 두렵구나.

 

낭독자 (F) 왕이 이 말을 전해 듣고 크게 노하여 협보의 관직을 파면하고, 관가의 장원을

          관리하게 하였다. 협보가 분개하여 그 나라를 떠나 남쪽으로 갔다.

<해설> 그러나 국내성 천도를 전후하여 가장 심각했던 것은 유리왕과 태자 해명과의

            갈등관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편에서 말씀드렸듯이 유리왕은 가장 아끼던

            큰아들 도절을 먼저 떠나보내고, 둘째아들 해명이 16세가 되자 자신의 왕위를

            이을 태자로 삼았는데요, 그 태자 해명이 새로 옮긴 수도 국내성으로 따라가기를

            거부하고 졸본성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병약했던 첫 아들 도절과는

            달리 해명은 힘이 세고 무예를 즐기는 용맹스런 청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웃나라의 사신이 해명태자를 찾아옵니다.

 

사신    저는 이웃 황룡국 대왕마마의 명을 받고 온 사신이옵니다.

 

해명    그래, 무슨 일로 오셨소?

 

사신   고구려국 태자마마의 무예가 출중하시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우리 황룡국 대왕

          마마께서 튼튼한 활을 선물해 드리라기에 가져왔사옵니다. 자, 받으시지요.

해명    아하, 그래요? 고맙소이다.

 

<해설>  아마 황룡국의 국왕은 고구려의 태자에게 강한 활을 선물함으로써 자신들의

             세력이 강성하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태자 해명은 이미 그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해명    으음, 좋은 활을 선물로 받았으니 어디 시위나 한 번 당겨봅시다. 으이차!

 

<효과>  (활 부러지는 소리)

             (신하들 놀라 탄성)

 

해명    어허, 이거 활이 부러져버렸네. 내가 힘이 강한 게 아니라, 활 자체가 별로 튼튼

           하지 못하군요.

 

<해설>  해명은 황룡국의 왕에게 고구려를 함부로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활을 부러

             뜨렸던 것입니다. 동국대 윤명철 교수는 태자 해명이 이런 행동을 보인 것은,

             외교적인 측면에서 아버지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합니다.

 

*인서트-4. 테입<5>

(03:14 유리왕이 아들이 세 분 있었어요. 근데 첫째분은 물에 빠져 돌아가시고 두 번째분이

해명태자거든요. 해명태자같은 경우는 수도를 옮기는 것을 상당히 반대를 했어요. 이런

것들은 분명 문제가 있는데 원래 첫 수도에 토대를 둔 토착세력과 해명태자의 연합관계,

그리고 상대적으로 유리왕과 신흥세력과의 연합관계라고 보는 있는데 그런 내부적인

요인도 있겠습니다만 당시 고구려 초기 입장에서는 가능하면 주변의 강대국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현실적인 외교를 지향했고 반면에 해명태자 같은 경우는 보다 적극적인

의사를 가졌으니까 젊고 혈기방장하고 그 담에 무예에 출중한 분이거든요. 04:01)

 

<해설>  어쨌든 이런 사태가 벌어지자 유리왕은 황룡국 왕에게 사신을 보내 이렇게

             얘기합니다.

 

유리왕  이번에 큰 결례를 범했소이다. 해명은 자식으로 불효를 저질렀으니 청하건대,

            내 아들의 목을 베어 죽여 버리시오.

 

<해설>  그리고 얼마 뒤, 황룡국에서 사신을 보내 해명태자와 만나기를 요청합니다.

 

신하    태자마마 이웃나라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만나자고 하니 그 의도가 수상합니다.

          목숨이 위태로울지 모르니 가지 마옵소서.

 

해명    걱정 마시오. 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면 황룡의 국왕이 감히 나를 어찌

           하겠소. 다녀오리다.

 

<효과>  (말 달리는)

<해설>  그런데, 해명을 만나본 황룡국 왕은 처음에는 그를 죽일 생각이었으나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니 감히 해칠 수 없을 만큼 출중한 인품이라 예를 갖춰서 그냥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이듬해인 유리왕  28년 3월에 국내성에 있던 왕이 졸본성

             으로 사람을 보내서 해명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유리왕  (에코)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켜 국가의 위업을 다지려는 것인데,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힘이 센 것만 믿은 나머지 이웃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 된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자, 내가 칼을 보내니, 이 칼로 자결하라!

 

해명    으음, 아버지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따를 수 밖에. 자, 그 칼을 이리 주시오.

 

신하    아니되옵니다 태자마마. 대왕마마의 장자가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태자께서는

           정당하게 후계자가 될 것이옵니다. 지금 대왕마마의 사자가 한 번 와서 말했다

           하여 자결한다면 대왕의 지시가 진실이라는 것을 어찌 알겠사옵니까. 필시 부자

           사이를 이간하려는 세력의 흉계가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해설> 유리왕과 해명태자 사이에 일어난 이 사건을 단순히 왕실내부의 권력다툼으로

            보느냐, 아니면 국내성 천도를 단행한 세력과 졸본성 잔류를 고집하는 세력간의

            다툼으로 볼 것이냐,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어느 한 쪽이 옳다고 쉽게 단정을

            내리기 어렵겠지요. 윤명철  교수의 얘깁니다.

 

*인서트-5. 테입<5>

(04:39 내부에서의 권력쟁탈전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하는데 물론 그런 면도 있어요.그러나

중요한 것은 초기국가이기 때문에 국가의 진로를 놓고 정책상의 갈등이 빚어진 거지요.

유리왕같은 경우는 국내성이 훨씬 입지가 좋습니다. 북쪽으로부터 공격의 예봉을 피할 수

가 있고  특히 부여란 존재가 북쪽에 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국  내성으로 옮기지마는

해명태자 같은 경우는 젊고 혈기방장하고 그 담에 첫 수도 지역에 토대를 둔 세력과 연합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명에서는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지요. 결국 그 과정 속에서 해명

태자가 스스로 아버지를 인정하는 거지요. 그래서 자살하는데. 05:20)

 

<해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태자해명의 자살하는 장면을 비장감 넘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해명    전번에 황룡국 왕이 강한 활을 보내왔기에, 나는 그들이 우리나라를 업신여길까

          걱정되어서 일부러 활을 잡아당겨 꺾음으로써 우리 고구려인의 기개를 보여주려

          했던 것인데, 뜻밖에도 부왕의 견책을 당하게 되었구나. 이제 부왕이 나를 불효하

          다고 생각하여 칼을 내려 자결케 하니 어찌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자, 저기 동쪽 뜨락에 창을 거꾸로 박아놓아라. 내가 말을 타고 달려가 그 창에

          장렬하게 찔려 죽겠노라.

 

<효과>  (말, 우는 소리)

 

해명    이랴, 가자!

 

<효과>  (말 돌진하듯 달리고)

<음악>  (비장감 넘치는, 장렬한)

<해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고려시대에 삼국사기의 이 부분을 집필했던 필자가

             이례적으로 자신의 사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낭독자  효자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마땅히 어버이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효도를 삼아야 한다. 해명은 아비를 따르지 않고 옛도읍에 살면서 용맹을 좋아

            한다고 소문이 났으니 당연히 죄를 범한 것이다. 또한 전해오는 말 중에 "아들을

            사랑하거든 옳은 방향으로 가르치고 사악한 길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왕이 처음에는 한 번도 가르친 일이 없다가, 죄악이 이루어진

            다음에 지나치게 미워하여 죽여 버리고 말았으니 이야말로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다 할 것이다.

<해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전형적인 양비론인데요, 어디까지나 삼국사기를 집필한

            고려 학자의 사적인 느낌을 적은 글입니다. 청취자 여러분은 유리왕과 해명태자

            그 두 부자의 비극적인 관계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십니까.  동국대

            윤명철 교수는 고구려인의 성격을 곧을 직(直)자와 마음 심(心)자를 써서 '직심'

            이라고 표현하는데, 바로 해명태자가 고구려인의 기상을 보여준 전형적인 품성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얘기합니다.

 

*인서트-6.  테입<5>

(06:23 해명태자같은 경우는 살아 있을 때도 황룡국의 왕이 보낸 활을 꺾어버린다든가

이런 강한 자의식이 있었는데 죽을 때도 충분히 죽음을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나라에 불충할 수 없다는 그런 명분을 내걸고 아주 장렬하게 산화하는 거지요.

이런 것들이 고구려가 가진 직심의 한 표본이라 볼 수 있고 이것이 나중에 호동 왕자로

연결이 돼요. 06:47)

<해설>  그렇다면, 국내성 천도를 왕실내부의, 혹은 권력을 담당했던 세력간의 갈등이나

             다툼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서, 역사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살펴볼까요?

             학자들은 첫 도읍지였던 졸본지역보다는 옮겨간 국내지역이 국가를 경영해

             나가기에 더 유리하다는 데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서트-7. 테입<5>

(02:06 그 지역만 가지고는 고구려가 발전할 수 없어요. 국내성 지역으로 가면 어떤 유리한

점이 있느냐면 일단 외부로부터 방어하기가 좋구요 아시다시피 노량산맥이라든가 압록강

이 막혀 있기 때문에 집안분지가 동서가 10킬로고 남북이 5킬로의 분지예요. 그러니까

바깥에서 적들이 쉽게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러고 동시에 바깥으로

열린 도시인데요 압록강을 통해가지고 바로 황해랑 연결될 수가 있어요. 국내성에 도읍을

청하게 되면 국내성에서 압록강을 따라 내려가서 압록강 하구에서 막 바로 황해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다른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 데에는

바로 그런 국제적 질서 속에 진입하려는 그런 의도하고 보여집니다.02:50)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럼 이번에는 유리왕 때 중국 중원정부와의 관계를 한 번 살펴볼까요?

             두 달 전인 2004년 9월16일, 서울 앰배세더 호텔에서는 고구려 관련 학술회의가

             열렸었는데요,  그 자리에서 중국의 선양동아 연구중심의 연구원으로 있는 여성

             역사학자 쑨홍은 이런 발언을 했습니다.

 

쑨홍(E)  현재의 중국 영토내에서 이루어진 고구려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인 것과 마찬가지

             로, 현재 프랑스 영토 내에서 이뤄진 고대 로마의 역사는 이탈리아 역사가 아닌

             프랑스의 역사입니다.  고구려는 기원전 2세기에 중국 한(漢)나라의 지방조직이

             었습니다. 한나라 밑에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라고 개명을 했고,

             한나라는 고구려 왕을 지방의 제후로 삼고 군을 징발해서 오랑캐를 치게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중국의 속국이었습니다.

 

<해설>  이런 주장에 대해서 고구려 연구재단의 김정배 이사장은 '역사를  영토를 기준

             으로 공유한다는 중국 사학계의 주장은 학문적 가치가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

             하고, 중국학자들의 주장 자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궤변의 연속이라고

             일축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를 하구려로 했다는 부분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 행사에서 단국대 서영수 교수가 반박한 대목은 이렇습니다.

 

서영수  (E)고구려는 한나라의 군사징발 요청을 거부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겁니다.

            고구려를 하구려로 한 것은 한나라 왕망이 화풀이 삼아서 일방적으로 부른 것이

            에요. 쑨홍의 자료 해석이야말로 자의적이고 억지스러운 것입니다.

 

<해설>  자, 그러면 이런 논란을 가져온 당시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할까요?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역사를 찾아서>에서 다루고 있는 유리왕 31년때

             였습니다. 먼저 어떻게 된 사건인지 인하대 서영대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기로

             하지요.

 

*인서트-8. 테입 <4>

(1:14:52 당시 중국은 한이 망하고 한나라의 외척이었던 왕망이라는 사람이 신을 건국하고

있었습니다.  이 신나라는 주변 지역에 대해서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압력을

가했었습니다.  고구려는 거기에 굴복하지 않았고, 고구려와 한을 이어받은 왕망의 신나라

와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중국측 기록을 보면 자기들이 고구려의 왕을 죽였다고

돼 있고.  우리 기록에는 보면 우리 고구려의 장수였던 연비라고 하는 사람이 죽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저희들 생각에도 우리나라 기록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왕이 죽었다기보다

도 고구려의 장수가 죽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리왕 때도 한과의

투쟁, 중국과의 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1:15:44)

 

<해설>  우선 중국쪽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이렇습니다.

 

왕망    고구려군을 징발해서 약탈을 일삼는 오랑캐를 무찌르라 했는데 어찌됐는가?

 

엄우    대왕마마, 고구려 군사들을 징발해서 흉노를 정벌하려고 했사온데, 고구려왕이

          군사 내주기를 거부했사옵니다.

 

왕망    어허, 이런. 그래서?

 

엄우    그래서 고구려군 일부를 강제로 징발해서 싸움터로 보냈는데 변방에서 모두 달아

           나버렸고 오히려 고구려군이 우리 신나라의 변방을 공격하고 있사옵니다. 요서

           대윤 전담을 보내서 그 고구려 군사들을 무찌르라 하였사온데, 그만 고구려 군사

           에게 죽음을 당했사옵니다.

 

왕망     이런 고이얀 놈들. 필시 고구려 '추'의 지시를 받고 한 행동이렷다!

 

엄우     하지만 추에게 죄를 물으시면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사옵니다.

 

왕망     무슨 소리! 여봐라, 거기 '우' 장군을 보내서 당장 추의 목을 베어 오게 하라!

 

<해설>  자, 그럼 이 대목을 기록한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고구려 편을

             들춰보기로 하겠습니다.

낭독자   (F)고구려 병사를 일으켜 오랑캐를 치려고 하는데 가고자 하지 않았다. 강제로

            다그쳐서 파견했는데 모두 변방에서 달아나버려 도둑이 되었다. 여서대윤 점담을

            보내서 고구려 군사를 공격하게 되었으나 요서대윤이 거기서 살해당했다. 엄우가

            왕에게 진언하길 '최는 추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추를 위로함이 마땅합니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왕망이 듣지 않고 장수 '우'에게

            공격하라 명하였다. 우가 고구려의 추를 꾀어서 만나기를 청했다. 추가 도착하자

            그의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었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천하에 포고

            하기를 고구려의 이름을 하구려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해설>  중국 역사서의 기록이 대강 이렇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장수가 고구려의 추를

             꾀어내어서 목을 뱄다고 했는데, 여기서 추라는 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위서

             동이전에 실려 있는 그 글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말 먹이는 사람 추(騶)'자로

             나와 있습니다. 고구려 시조인 주몽을 추모라고도 하고 그냥 추라고도 불렀기

             때문에, 주몽 시절이라면 왕을 죽였다는 얘기가 될 텐데, 이 때는 2대 유리왕이

             등극한지 31년이 되는 해입니다. 어쨌든 중국학자들은 여기 나온 '추의 목을

             베었다'는 부분을 왕을 죽였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쪽의 기록인

             삼국사기에는 같은 사건이 어떻게 실려 있는지 볼까요?

낭독자  (F)한 나라 왕망이 우리 군사를 동원하여 오랑캐를 치고자 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가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강제로 협박하여 보내려 하니, 모두 변방으로 도망하여

            법을 위반하고 약탈을 하였다. 요서대윤 전담이 추격하다가 죽었다. 한나라에서

            는 우리에게 잘못을 돌렸다. 엄우가 왕망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지금 큰 죄를 묻게

            되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된다. 부여의 족속 가운데 반드시 고구려를 추종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우리가 오랑캐를 수주지 못하고 있는 지금,  다시 부여, 예맥까지

            일어난다면 이는 큰 걱정거리다'라고 하였다. 왕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엄우에게

            공격을 공격하라는 명을 내렸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를 꾀어내어 목을 베어

            한나라의 수도로 보냈다. 왕망이 기뻐하여 우리 왕을 하고구려 제후(侯)로 개칭

            하고  이를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그 뒤로 한나라 군사가 우리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해설>  그러니까 삼국사기에는 연비라는 고구려 장수가 죽은 것으로 돼 있는데 중국 사서

             에는 왕을 죽인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여기 등장하는 '추'는 인근

             황룡국의 여달왕이었을 것이라고 추측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한나라의 후예인

             신나라의 왕망이 일방적으로 고구려를 하구려로 부르라고 선포했던 것을 고구려

             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논리에 갖다 붙여서는 안 되겠지요. 만일 그렇다면 하구

             려로 부르기 이전의 고구려는 그럼 중국 정부에 예속되지 않는 독립국가였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음악>  (브릿지)

 

<해설>  유리왕 말기에 고구려는 주변의 작은 세력들을 통합해서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일대의 강자는 부여국이었습니다. 유리왕 28년 8월

             에는 부여국 대소왕이 신하를 보내서 유리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라고 협박하

             기도 합니다.

 

대소왕  (에코)우리 선왕이 그대의 선왕 동명왕과 의좋게 지냈는데, 이제 우리 신하들을

            이 곳으로 도망 오도록 유인하는 것은, 우리 백성을 끌어들이자는 것 아닌가.

            나라에는 대국과 소국의 구분이 있고, 사람에도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있으니

            소국으로 대국을 섬기는 것은 예절이며, 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은 순리라 할

            것이다. 이제 만일 고구려 왕이 예절과 순리로서 우리를 섬긴다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 나라의 운명이 영원히 보존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하려

            해도 어려울 것이다.

 

<해설>  유리왕은 부여 신하가 가지고 온 대소왕의 이런 협박성 요구를 놓고 신하들과

             대응책을 모색하게 됩니다.

 

중신      이것은 우리 고구려 조정을 욕보이자는 처사이옵니다. 저들이 요구하는 대로

            순순히 따라서는 아니 될 것이옵니다.

 

유리왕  (한숨)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나라를 세운 역사가 짧고 군대가 약하니 이 치욕을

            굴복하고, 후일의 성과를 도모하는 것이 나라 형세에  합치되는 처사가 아니겠는

            가. 사신을 통해 부여 왕에게 이렇게 전할 것이다. '과인이 바다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왔기에 예의에 대한 것은 듣지 못 하였는데, 이제 대왕의 교시를 받고 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나이다'

 

<해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유리왕의 셋째 아들 무휼 왕자가 등장합니다. 첫째 왕자 도절이 병으로 죽고,

둘째 아들 해명태자가 부자간의 갈등 때문에 자결했으나, 다행히도 유리왕에게는 총명하고 용맹스런 셋째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린 무휼은 유리왕이 부여 왕에게 굴욕적인 회답을 보내려 한다는 얘기를 듣고 직접 부여의 사신을 만납니다.

 

무휼     (7-8세)나는 고구려국의 왕자 무휼이다. 우리 선조는 신령의 자손으로서 현명하고

           재주가 많았는데 지금 부여의 대소왕이 질투하여모해를 했고, 부왕에게 말이나

           기르게 하는 직위를 주도록 참소하여 욕을 보인 까닭에 불안하여 부여를 탈출한

           것이다. 그런데 부여의 대왕이 전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군사가 많은

           것을 믿어 우리나라를 멸시하고 있으니, 사신은 돌아가서 대왕에게 이렇게 전하라.

           이곳에 알을 쌓아놓았으니 만약 대왕이 그 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내가 대왕을

           섬길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못 하겠노라고 전하라.

 

<해설>  삼국사기에서 그 이후의 이야기를 보면 이렇습니다.

 

낭독자  (F)부여왕이 이 말을 듣고 여러 사람에게 두루 물었다. 한 노파가 말했다. "쌓아놓

            은 알은 위태로울 것이니, 그 알을 무너뜨리지 않는 자는 편안할 것이다". 노파의

            말은 곧 왕이 자신에게 위기가 왔음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남이 와서 굴복하기를

            강요하고 있으니, 평화를  택하여 자기 나라를 먼저 잘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해설>  이 지혜롭고 용맹스런 어린 왕자가 바로 고구려의 제3대 왕인 대무신왕이 됩니다.

              결국 고구려가 부여의 요청을 거부하자, 유리왕 32년 11월에 부여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범해 들어오게 되고, 유리왕은 어린 왕자 무휼에게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게 합니다.

<효과>  (군사들 말 달리다가 몸추고)

 

무휼     자, 여기서 멈추거라! 우리는 군사가 적어 부여의 대군에 맞서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 부여의 대군이 반드시 이 학반령 계곡을 지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골짜기에

           숨어 있다가 저들이 계곡에 들어섰을  때 기습 작전을 감행하도록 하자.

<해설>  아닌 게 아니라 부여의 군사가 그 계곡으로 들어섰고,

 

무휼     자, 공격하라!

 

<효과>  (함성 지르며 돌격하는)

<해설>  무휼이 군사를 출동시켜 불시에 공격하니 부여 군사들은 크게 패하여 마필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는데 무휼이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그들을 전부 죽였

             다-, 삼국사기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때 무휼의 나이가 겨우 열 살이었습

             니다. 나중에 그가 대무신왕이 되는데요, 글자대로 풀이하자면 '큰 전쟁의 신'

             (大武神王)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처럼 그는 재위 기간에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기상을 유감없이 과시했고, 동명성왕과 유리왕의 업적을 이어서 나라의 기틀을

             다진 임금으로 기록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유리왕 37년 여름에는 여진이라는 왕자가 물에 빠져 죽습니다. 그러니까 첫아들

             도절이 병으로 죽고, 둘째 해명이 자결하고, 또 한 사람의 왕자가 익사했으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리왕은 세 명의 자식을 자신보다 먼저 보낸 셈이 됩니다.

             게다가 우리가 황조가를 소개하면서 살펴봤던 것처럼 부인 치희가 도망을 했

             으니 개인사 적으로 보자면 상당히 불행했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급적

             전쟁을 피하면서 주변 세력들을 규합하여 고구려가 강대국으로 성장할 토대를

             마련한 뛰어난 임금이었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그렇다면 유리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대무신왕은 고구려사 전체를 놓고

             볼 때 어떤 임금이었을까요? 한신대 임기환 교수의 얘깁니다.

 

*인서트-9.  테입<4>

(39:26 대외적으로 대무신왕의 존재가, 중국 기록에는 대무신왕이 나오진 않습니다만

중국에서 고구려 왕을 인식했던 때를 삼국사기 기록과 비교해 보면 대무신왕이 되거든요.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식시킨 존재가 되고.  설화의 시대 신화의 시대로

표현될 수 있고, 한편으로는 바로 역사의 시대로 출발하는 게 대무신왕 때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신화에서 설화에서 역사 기록으로 넘어가는, 내용상

으로 볼 때.  그런 것이 중첩되어 있는 시대.  전환기라고 그럴까.  고구려를 고구려답게

만들어 가는 시작점이 됐던 시기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죠. 40:14)

 <해설>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이름이 올라 있을 만큼 고구려 전체를 놓고 볼 때에도 그

             업적이 지대하다는 얘긴데요, 그가 왕위에 오를 당시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다름

             아닌 부여국이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편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낭독자   (F)겨울 10월에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시켜 머리는 하나인데 몸뚱이가 둘 달린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서 왕에게 바치자,

            어떤 사람이 부여왕에게 말하기를, 까마귀는 원래 검은 것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은 빛을 띠고, 또 머리는 하나인데 몸뚱이가 두 개인 것은 두 나라가 병합한다

            는 뜻이니 고구려를 병합하게 될 징조라고 했다. 대소 왕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

            며 붉은 까마귀를 고구려에 보내면서 그 말도 함께 전하였다.

<해설>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 달린 까마귀를 전해받은 대무신왕은 부여왕에게 이렇

             게 대꾸를 합니다.  

 

대무신   검은 것은 원래 북방의 빛인데, 이제 그 빛이 변하여서 붉게 되었으니 남방의 빛

             이 되었다는 뜻이고, 그리고 붉은 까마귀는 예로부터 상서로운 것이거늘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갖지 않고 나에게 보냈으니, 두 나라의 흥망은 아직 없겠노라!

 

<해설>  이 말을 전해들은 부여 왕은 한편으로 놀라고 또 한편으로는 까마 귀 보낸 것을

            후회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말하자면 양국간의 심리전에서 대무신왕이 기선을

            제압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왕자 시절에는 부여국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전쟁을 치른 적이 있었던 대무신

             왕이, 재위 4년째 되던 해, 서기로는 기원후 4년 12월에 군사를 이끌고 부여 정벌

             에 나섭니다. 동국대 윤명철교수입니다.

 

*인서트-10. 테입<5>

 (08:01 주로 군사적 활동을 많이 하는데 예를 들면은 고구려의 상대적인 적이면서도 시원인

부여를 공격하거든요. 부여족을 공격해서 예봉을 일단 막고, 그 담에 고구려는 주몽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유리왕 대무신왕까지 거쳐 마지막 태조대왕까지 계속되지만 주변에

있는 소국들을 정벌합니다. 이 조그만 나라들은 단순하게 부족국가나 성읍국가가 아니라

이미 그 이전에 있엇던 조선이란 정치적 실체가 멸망하고 난 다음에 그 지역에서 일어난

정치세력들이 일단 소국이라고 불려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당연히 그 소국들

가운데 하나로 출발했지만 그 소국들 전체를 정복해서 나름대로 조선의 땅을 회복할 만한

역사적 의미가 있었던 거죠.  08:47)

<해설>  그러니까 대무신왕이 정벌하겠다고 나선 부여국이 고조선 땅에 있기 때문에,

             부여 정벌 자체가 옛 조선 땅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므로 명분도 있고 정당성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지금 대무신왕이 정벌하겠다고 나선 부여와 주몽이

             처음 도읍을 했던 졸본부여와는 어떻게 다르며, 삼국사기에 자주 등장하는

             동부여나 북부여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우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부여를 설명하고 있는 대목을 잠시 들여다보기로

             하지요.

낭독자  (F) 부여는 현도땅에서 천리를 간다. 남으로 고구려가 있고 동쪽으로 읍루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선비가 있다. 북쪽으로는 약수가 있으며, 영토가 가히 2천리나 되고

           호수는 팔만호이다. 백성은 토착생활을 하고  사람들의 성격은 강하고 용감하다.

           흰색 옷을 좋아하고 비단옷 입기를 숭상한다.

<해설>  여기서는 고구려가 이미 터전을 잡고난 뒤의 부여를 설명하고 있는데, 고구려

             역시 졸본부여라 불리는 부여의 영토에다 나라를 세웠으니 부여가 고구려의

             모태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인서트-11.  테입<5>

(10:57 고구려의 시원을 부여에서 보고 있거든요. 그래서 추모는 북부여에서 비롯됐다고

보고있고 그 다음에 동부여같은 경우는 주몽이 일시적으로 머물렀다고 보고 있는데 이

부여를 전체로 하나의 통일체로 보면서 시대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북부여 동부여 또는

졸본부여 그러는 경우도 있고 또 그렇지 않는 경우도 또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설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조선이 있을 때 조선의후반기에 가게 되면 부여란

정치적 실체가 있었던 건 틀림없거든요. 그런데 고구려가 성립될 무렵에는 부여의 통일성이

깨져나가는 것같아요. 그러면서 가장 근본이라고 볼 수 있는 건 현재로 볼 때는 북부여가

될 수가 있고 다음에 동부여가 될 수가 있고 남쪽에 있는 거는 졸본부여인데.11:44)

<해설>  그러니까 주몽이나 유리왕 시기의 고구려 영토가 부여 영토의 남부지방 일부였을

             만큼 부여는 범위가 넓었는데, 전체 부여가 통합된 국가체제를 갖춘 게 아니라

             부여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다, 따라서 지금 대무신왕이

             정벌하겠다고 나선 그 부여는 많은 부여족들 가운데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북부여의  한 나라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이 고구려 역사상 처음으로 부여를 선제공격 하러 가는

             과정을 상당히 신화적으로 소개하고 있는데요, 그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낭독자   (F)겨울 12월에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부여를 치러 가다가 비류수 옆이 이르러

             바라보니 마치 어떤 여인이 솥을 들고 노는 것 같았는데, 가보니 여인은 없고

             솥만 있었다. 불을 때기 전에 솥이 저절로 열이 났으므로 금세 밥을 지어 전체

             군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이 때 웬 건장한 사내가 나타나서 왕에게

             말했다.

 

사내      이 솥은 우리 집 물건으로 나의 누이가 잃어버린 것인데 지금 대왕께서 얻으셨

            으니, 거두어 주신다면 제가 솥을 지고 따라가겠나이다.

 

대무신  오호, 고마운지고. 그리하거라.

 

낭독자  왕이 이물림 지역에 이르러 묵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렸다. 밝을 무렵 그 곳을

           수색하여 금으로 만든 옥새와 병기 등을 얻었다. 길을 떠나려 할 때 웬 사람이

            나타났는데 키는 9척 가량 되며 얼굴이 희고 광채가 있었다. 그가 왕에게 말했다.

 

괴유     저는 북명에 사는 괴유라는 사람이옵니다. 대왕께서 북쪽의 부여를 친다는 말을

           들었사옵니다. 청하옵건대 제가 따라가서 부여 왕의 머리를 베어오겠습니다.

 

낭독자  또 웬 사람이 나타나서는 이렇게 말했다.

 

적곡    저는 적곡에 사는 마로라는 사람인데 청하옵건대 긴 창을 가지고  길을 인도하

          겠사옵니다.

<해설>  설화투로 기록돼 있는 이 부분을, 우리역사문화연구소의 김용만 소장은 자신의

             저서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에서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김용만 (F) 한겨울에 백성들의 농사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겨울철에 부여정벌

            에 나섰는데, 그 동계적전의 가장 큰 어려움은 따뜻한 식사와 잠자리를 마련해 줄

            땔감을 구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불을 지피다가 적에게 군대의 위치가

            발각되면 낭패를 당하게 되지요. 따라서 불이 없이도 데워지는 솥을 얻었다는

            부분은 아마도 비류수 지역의 대부호가 고구려군에게 양식을 기증해서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이렇게 해석할 수가 있지요. 그리고 금으로 만든 임금의 도장과

            무기를 얻었다는 대목은 아마도 대장장이 세력이 고구려군에게 협조했다, 이렇게

            보면 될 것입니다.

 

<해설>  동명성왕 시대는, 물론 건국 초기인 만큼, 건국신화인 주몽설화를 곁들여서 역사

             를 서술했다는 점은 이해가 됩니다만, 삼국사기에서는 2대 유리왕이나 3대 대무

             신왕의 업적을 기록한 부분까지 이렇듯 설화투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

             습니다. 대무신왕을 전환점으로 해서 삼국사기의 역사기록 방식도 바뀌게 됩니

             다. 한신대 임기환 교수의 얘깁니다.

 

*인서트-12. 테입<4>

(38:01 고구려의 설화를 보면 대무신왕 때까지가 설화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어요. 광개토

대왕비에도 보면 고구려 시조를 얘기하는데 추모왕 유리왕 대무신왕 이 세 왕을 거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상으로 보더라도 부여라는 존재가 주몽 때부터 등장해 가지고

대무신왕이 공격해서 멸망시키는 때까지 해서 끝나게 되고요. 대무신왕이라고 하는 이

시대는 설화의 시대.  설화가 대무신왕까지 끝나는.  고구려를 건국한 시조적 개념으로

볼 때 3대에 걸쳐 있는 시조 시대라고 볼 수 있죠.  설화의 시대고. 38:45)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럼 부여와의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살펴보기로 할까요?

<효과>  (군사들, 말타고 행군하다 주춤거리는)

             (말굽 진창에 빠져 질척거리는 소리)

 

마로    대왕마마, 여기서부터는 진창이 많아서 더 전진할 수가 없나이다.

 

대무신  오호, 그래? 그렇다면 일단 행군을 멈추고 평지를 골라서 병영을 만든 다음

            군사를 편히 쉬게 하라!

 

마로    예.

 

<효과>  (병장기들 내려놓고 말에서 내리는 등)BG

<해설>  그런데, 고구려군이 미처 전투태세를 갖추고 못하고 있는 사이, 부여의 대소왕은

             온나라에 있는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공격해들어옵니다.

<효과>  (말탄 병사들 몰려오는)

 

마로      대왕마마, 부여군이 급히 진격해오다가 진창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형국

            입니다.

 

괴유     부여왕의 머리를 벨 기회가 바로 이 때이옵니다.

 

대무신  누가 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오겠는가!

 

괴유     제가 가겠사옵니다.

 

대무신  장수 괴유는 출진하여 부여왕의 마리를 베어오너라!

 

괴유     예, 대왕마마. (고함)야아아-!

 

<효과>  (말들 달리는)

             (전투-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해설>  삼국사기에는 그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낭독자 (F)부여 왕이 온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가 준비하지 못한 틈을 타서 덮치려

           고 말을 급히 달려 앞으로 나왔으나 진창에 빠져서 오도가도 못 하게 되었다. 이

           때 왕이 괴유를 나아가게 하였다. 괴유가 칼을 뽑아들고 사자처럼 부르짖으면서

           쳐들어가니, 부여의 만여군졸이 넘어지고 쓰러져서 지탱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 바로 내달아 부여왕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해설> 유리왕 때지만 해도 부여는 그 세력이 강해서 외교적으로 굴욕을  당하면서까지

            고구려가 방어에 급급할 수 밖에 없었는데, 전쟁의 신으로 일컬어지는 대무신왕

            은 선제공격에 나서서 막강 부여의 대소왕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대무신왕이 정벌에 나섰던 대소왕의 부여는 지금의 어느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을까요? 중국현지를 답사한 적이 있다는 윤명철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지요.

 

*인서트-13. 테입<5>

(12:32 그 기록을 보면은 갔을 때 진흙이 많다라든가 이런 표현들이 나오고 있거든요.

적어도 길림 이남에서는 그런 지역은 보일 수가 없어요. 길림 이남은 전부 깊은 산과

강으로 돼 있기 때문에 그런 지역이 없고 길림을 지나서 장춘이라든가 농안 정도 가면은

비로소 초원이 나타나고 흙이 많고 또 진흙이 있고 또 진흙을 가지고 집을 지은 것들이

나타나거든요. 또 한 가지는 명마라는 얘기가 나와요. 부여의 명마를 그 당시의 대무신왕

이 얻게 되는데 이런 명마의 산지도 사실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국내성이라든가 환인

지역 또는 길림지역이 아니라 훨씬 더 북쪽으로 간 지역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명마예요. 13:17)

<해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고구려와 갈등을 빚었던 부여는 현재의 장춘이북 지역일

             가능성이 높고, 고구려 시조 주몽이 탈출했던 부여 왕실 역시 그쯤에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애깁니다.

             자, 그런데, 상대방 진영의 우두머리인 왕의 목을 베어왔으니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다고 해야 할 터인데, 국내성으로 돌아온 대무신왕은, 경솔하게

             부여를 쳤다가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고 후회를 합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다음주 이 시간에 뵙겠습니다.  

<음악>  (엔딩)

*시그널 + 클로징

 

 

 

                         나오는 사람들

 

남자1                           곽윤상

남자2                           이재웅

유리왕                         유호한

탁리(궁궐 사육사)         신찬혁

사비(궁궐사육사)          손정성

설지(궁궐사육사)          최창석

협보(신하)                   홍진욱

사신(이웃나라)             김대중

해명(왕자. 10대 후반)    박찬희

신하                            윤동기

쑨홍(여. 중국학자)        전숙경

서영수(한국학자)          이재웅

왕망(한나라 왕)            홍진욱

엄우(한나라 신하)         곽윤상

중신                            진웅

무휼(왕자, 7-8세. 대무신왕의 어린 시절)     나지형

대무신(고구려 제3대왕)      안종익

괴유(고구려 장수)              김대중

적곡(신하)                         손정성

김영만(고구려 연구자)        윤동기

마로(신하)                         이광수

낭독                                  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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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2.12.02
15: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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