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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시원문화 환단고기 북콘서트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3편>

                           신화속에서 걸어나와 역사를 만든 유리왕

 

 

                                                                            극본-이상락  연출-이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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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 + 타이틀

<해설> 안녕하십니까.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의 김연갑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동명설화를 중심으로 해서,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부여를 탈출하여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지역에 터를 잡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주몽은 맨몸으로 부여를 빠져 나왔기 때문에 말이 도읍이지 처음에는

           변변한 궁궐 한 채 갖추고 있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왕

           편을 들춰보면 이렇습니다.

낭독자(F) 그 지방의 토지가 비옥하고 산천이 준험함을 보고 마침내 도읍을 정하려

               했으나,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서 그저 비류수가에 초막을 짓고 지냈다.

<해설>  시작은 그렇게 초라했다는 얘긴데요, 우선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을 때 당시

             주변상황이 어떠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인하대 서영대 교수입니다.

 

 *인서트-1.  테입<3> 서영대 교수

(36:38 부여에서부터 남하한 주몽이 고구려 지역에 정착을 해서 고구려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그 주변에 비슷비슷한 정치세력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무슨 那 무슨 나 해서 그

나라는 이름, 나라는 이름은 땅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

강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정치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기록에 나오는 걸 보면 강력한 세력

으로서 송양왕이 다스리는 비류국이라고 하는 나라도 있었습니다. 고구려가 이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주변세력과 경합을 해서 그들을 통솔을 하든지 병합을 하든지 하는

이런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37:19)

<해설>  여기서 말하는 '나(那)'라는 글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나라 이름 나'자로 나와

             있습니다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 즉 '국가' 의 규모가 아니고 작은

             단위로 부락을 이뤄 살고 있었던 무리들로 보는 게 무난할 것 같습니다. 한신대

             임기환 교수입니다.

 

*인서트-2.

(2:26 조그만 나라들. 어떻게 보면 나라라고 하기도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만, 지역별로.

고구려에서는 나(那)라고 했고 또는 나국이라고 하는데.  '나'라는 뜻은 강가의 평야, 이런

뜻을 갖고 있는데.  '내', 이런 의미를 갖고 있는 거죠.  나라고 하는 일정한 지역을 기반

으로 하고 있는 작은 나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주몽이 내려왔을 때 고구려를 만들었을

때 주몽의 세력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나들 세력에 불과한 요런 정도로 볼 수 있겠죠.03:07)

<해설>  어쨌든 고구려가 세력을 키워서 나라의 기틀을 다져가려면 이 무리들을 통합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분노   대왕마마, 우리 고구려 바로 옆에 말갈 부락이 붙어 있는데, 그들이 우리를

            얕보고 침범할까 우려되옵니다.

 

주몽     어허, 그렇다면 그들을 물리쳐서 우리 고구려의 기상을 보여 주자구나. . 자, 가자!

 

<효과>  (함성)

             (말들 달리는)

<해설>  이렇게 해서 말갈을 물리치는데, 삼국사기에서는 그 부분을 아주 간략하게 표현

             하고 있습니다.  

낭독자(F) 주몽은 마침내 말갈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서 감히 침범하지 못 하였다.

<해설>  이처럼 간단하게 언급한 것으로 보아서 말갈은 그저 떠돌이 집단의 한 부락에

             불과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역시 고구려와 인접해 있던 비류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와는 반대로 대단히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류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인하대 서영대 교수입니다.

 

*인서트-2-1.

(50:59 이러한 여러 정치 세력들 가운데서 가장 세력이 강하고 그래서 여러 정치 세력들의

연맹장 역할을 하는 그런 세력이 있었는데, 그것이 비류국의 송양왕이라고 전해지고 있습

니다. 비류국의 송양왕은 당시 압록강과 동가강 유역의 연맹장 자리에 있으면서 새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에게도 복속을 요구했었습니다. 고구려 건국 신화에 의하면 이때

주몽왕은 복속을 거부하고 송양왕과 실력 대결로 맞섰습니다.  예를 들어서 활 시합을

한다든지.  그렇게 해서 끝까지 복속을 거부했고.51:40)

<해설>  그러면 그 부분을 기록한 삼국사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낭독자(F) 비류수 중류에 채소 잎이 떠내려 오는 것으로 보아 그 상류지방에 사람이 사는

              줄 안 왕이, 사냥을 하면서 찾아 올라갔다. 그 나라 임금 송양왕이 왕을 보고

              말했다.

 

송양왕    내가 해변 구석에 외따로 살기 때문에 한번도 훌륭한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는데,

             이제 우연히 그대와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주몽    허허허, 나는 하늘의 아들로서 근처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세웠노라.  

 

송양왕  우리는 여러 대(代)째 왕이 되어온 터에 땅이 적어서 두 임금은 용납할 수 없고,

            그대는 도읍을 정한지가 얼마 되지 않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떠한가?

 

주몽     나는 하늘 신의 아들이고 송양왕 당신은 신선의 자손인데 그대의 속국이 되라

           하니, 만일 나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하늘이 그대를 벌할 것이라!

 

<해설>  고구려의 주몽과 비류국의 송양왕은 날카로운 말다툼을 하고난 다음에 재주를

             겨루어서 누가 우월한지를 결정하기로 합니다. 먼저 활쏘기 경기를 하는데

             글쎄요, 주몽이라는 이름 자체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의미할진대 송양왕이

             대적할 수 있었겠습니까?

 

송양왕   나는 백 걸음 떨어진 곳에서 저 사슴의 배꼽을 맞히겠노라.

<효과>  (활 시위 당기는)

             (화살 날아가는)

 

<해설>  그러나 송양왕이 쏜 화살은 사슴을 빗나가고 맙니다. 이어서 주몽의 차례였는데

             주몽은 역시 백 보 떨어진 거리에 옥반지를 걸어놓고 그걸 맞히겠다고 장담합니다.

<효과>  (활시위 당기는)

            (화살 날아가는)

            (기왓장 부서지는 소리)

<해설>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쏜 화살이 옥반지를 맞히자 옥이 깨지는 소리가 기왓장

            깨지는 소리가 났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활쏘기 내기에서 완패를 당했

            음도 불구하고 송양왕은 주몽에게 항복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주몽은 비류

            국을 고구려에 복속시키기 위해서 갖가지 신통력을 발휘합니다.  

 

주몽     만약에 하늘이 비를 내려서 비류국을 물바다로 만들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니라. 사슴아, 네가 고통을 면하려거든 하늘에 호소하여라!

<효과>  (사슴 울음소리)

             (폭우 쏟아지는)

 

낭독자  사슴이 슬피 울자 소나기가 이렛동안 쏟아져서 비류국을 물바다로 만들어버렸고,

            주몽이 오리를 타고 있다가 채찍으로 물에 금을 그으니 그제서야 물이 줄어들었다.

            동명성왕 여름 6월에 송양이 와서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해설>  그렇다면 이 황당하기 그지없는 설화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한신대 임기환 교수의 설명입니다.

 

*인서트-3.

(06:55 주몽이 도읍을 한 뒤에.  삼국사기에 보면 강에 뭐가 떠내려와 가지고 올라가서

보니까 비류국 송양왕이 있었던 것이고. 그리고 동명왕 편에는 송양과 주몽이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변신술을 발휘해서 서로 경쟁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런 장면 자체는 설화적인 것이지만, 주몽이라는 세력 집단과 비류국이라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세력 집단이 서로 그 지역의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볼 수가 있죠.07:34)

 <해설>  '고구려의 주몽이 비류국과의 패권다툼에서 승리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그런 설화의 방식으로 기술한 것은, 당시 고구려가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

              서는 국가건설을 신성화하고, 나라의 시조를 신격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 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러면 주몽이 비류를 고구려에 복속시키는 부분을 기록한 대목에서 어떤

             역사적 진실을 찾을 수가 있을까요?

낭독자(F) 송양이 항복해오자 그 지방을 다물도(多勿都)라 하고 송양을 그곳 우두머리로

              봉하였다. 고구려 말에 옛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였으므로 지방의 명칭을

              삼은 것이다.

<해설>  이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가 옛땅을 회복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여기서 옛 땅이

             란 어디일까요? 고구려 땅이 과거 고조선의 영토였기 때문에, 그 곳에 살던 고조

             선 사람들에게, 한나라에 의해서 멸망한 고조선을 다시 부흥시키자는 구호를

             내 건 게 아니겠는가, 따라서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다,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는 얘깁니다.   

             두 번째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주몽이 비류의 송양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음

             에도 불구하고 송양왕을 그 곳의 우두머리로 봉하고, 독자적인 통치를 인정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서트-4.

(08:09 이런 큰 나라들이 주변에 있는 작은 나라들을 통합해서 조금 더 큰 세력을 갖게

되죠.  주몽도 그런 세력 중에 하나였고 아마 비류국도 그런 세력 중의 하나일 겁니다.  

주변 것을 통합하는 큰 세력들이, 큰 세력은 큰 세력끼리 또 경쟁을 하고 통합하려는

과정에서 고구려라는 연맹체 국가가 만들어집니다.  그렇지만 비류국 같은 나라는

독자적으로 자기 세력 기반이 있고 자기 나라를 운영하는 정치 집단이 있기 때문에,

주몽이 일방적으로 그들을 복속시킬 수가 없죠.  그래서 연맹체를 구성하게 됩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비류국의 송양왕이 주몽에게 복속을 해도 주몽을 봉작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08:57)

<해설>  주몽은 비류국을 비롯한 주변세력을 차근차근 통합해나가지만, 그 집단들 각자

             가 나름의 세력기반이 있기 때문에 느슨한 연방체제 형태로 각 집단의 독자성을

             인정해주었다는 얘깁니다. 즉 한나라와의 관계 등 대외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고구려 왕인 주몽이 대표성을 가지되, 대내적으로는 각각의 집단이 자치권을

             가지는 식이었다는 분석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주몽은 졸본에 도착한지 4년만인 기원전 34년에 궁궐을 짓게 됩니다. 고구려

             본기 동명왕편을 보면,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건축하였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록에서 설명하고 있는 궁실이 들어선

            장소는 어디일까요? 한신대 임기환 교수입니다.

 

*인서트-5.

(04:40 주몽이 처음으로 도읍한 지역을 지금 중국의 요녕성의 환인 지역으로 보고 있지요.

환인에 가면 사진도 많이 보셨을 텐데 오녀산성이라고 하는 성이 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오녀산성은 고구려 초기에 만들었던 성인데, 그렇다고 주몽이 나라를 세울 때 그때

만들었던 성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 뒤에 아마 기원 2-300년 정도에 만들었다고

추정하기도 하는데요.  그건 유사시에 피난 가는 성이고, 주몽이 일반적으로 거주하는

성은 평지에 있었겠죠.  평지에 있는 성은 어디냐는 것은 논란이 좀 있습니다.  지금 정확

한 위치를 알기는 어려운데 환인 일대, 그 일대에 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05:29)

 <해설>  고구려의 왕은 평시에는 평지에 있는 성에서 정무를 보다가, 외적이 침입해오면

              산꼭대기에 있는 성으로 옮겨가서 방어태세를 취하는 '양성체제'로 운용됐다,

              이런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광개토대왕비문에 나타난

              홀본의 서성산은 중국의 환인 지역에 있는 오녀산성이 틀림없는데, 삼국사기에

              서 '성곽과 궁실을 건축했다'는 대목은 그 산성이 아니라 평지에 세운 다른 성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 이러한 분석입니다.

 

*인서트-6.

(48:59 주몽이 부여에서부터 남쪽으로 내려와서 처음 도읍으로 했던 곳에 대해서는 광개

토왕릉비에 명확한 기록이 나옵니다.  홀본이라는 곳에 서쪽에 산에 성을 쌓고 도읍을 했

다라고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주몽이 도읍을 했던 곳은 평지에 성을 쌓고 도읍을

했던 것이 아니고 산꼭대기에 도읍을 정했던 모양입니다.  이 성이 어디냐라고 했을 때,

현재 중국의 요녕성 환인현에 있는 오녀산성.  그것이 바로 최초의 주몽의 도읍지 아니겠

느냐 하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49:40)

<해설>  한편 인하대 서영대 교수는 아예 지금부터 지금의 요녕성 환인에  있는 오녀산성

            그 자리가 최초의 도읍지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입니다.

            첫 도읍지가 산에 있는 성이었든, 평지에 있는 성이었든, 그것이 고구려의 정체성

            에 큰 영향을 주는 문제는 아니겠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기원전 37년에 나라를 세우고 햇수로 19년에 걸쳐 왕위에

             있다가 기원전 19년에 죽은 걸로 돼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기원전 19년의

             기록을 볼까요?

낭독자(F)여름 4월에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돌아오니,

             왕이 기뻐하며 그를 태자로 세웠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으니, 이 때 나이가 마흔

             이었다. 용산에 장사하고 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해설>  이제 시조인 주몽에서 고구려의 왕권이 제2대 임금인 유리왕으로 넘어가게 되는

             데, 유리왕의 태생이나, 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 과정 등에서 여러 가지 의문

             점들이 나타납니다.  우선, 삼국사기에 의하면 유리왕은 주몽의 친 아들로 돼 있

             음에도 불구하고, 성씨가 고씨가 아니라 해(解)씨로 돼 있습니다.

             임기환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시죠.

 

*인서트-7.

(11:28 왕계를 보면 주몽은 고씨로 되어 있고요.  또 다른 기록에 보면 유리왕부터 모본왕

까지 해씨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태조왕이 다시 고씨로 나오고. 그래서 고씨와

해씨로 나누게 되면, 유리왕부터 모본왕 때까지는 주몽하고는 혈통이 다른 왕계였다는 주

장도 있습니다.  고씨와 해씨가 왕위를 바꿔서 했다.  원래는 해씨가 왕을 했는데 그 뒤에

고씨가 왕위를 차지했던. 그런데 고씨의 시조를 해씨보다 위에 붙여서 고주몽이 제 1의

시조로 되어 있는 이런 구조를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하기도 합니다. 12:19)

<해설>  중국측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원래 소노부라는 정치집단이 왕을 배출하다가

             나중에 계루부라는 집단에서 왕권을 잡았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

             은 소노부가 해씨이고 계루부가 고씨이므로, 해씨에서 고씨로 왕권이 넘어온 것

             아니냐, 이런 주장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문제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와 비류가 주몽의 친아들, 즉 유리왕

             의 이복형제였느냐 하는 대목입니다. 이 부분을 염두에 두면서 태자 유리의 등장

             과 왕위 계승과정을 탐색해보기로 하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지난 시간에 주몽이 부여를 탈출한 과정을 소개했습니다만, 당시 주몽은 긴박한

             상황에서 부여를 빠져나왔기 때문에, 어머니인 유화 부인은 물론, 자신의 아내인

             예씨 부인도 부여에 남겨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리는 주몽이 부여

             를 떠나고 난 다음에 태어난 것입니다. 고구려 건국신화 중에서 유리왕의 어린

             시절 얘기를 풀어서 소개하자면 대강 이렇습니다.

낭독자    남편이 떠난 후 혼자 부여에 남은 예씨부인이 아이를 낳았다. 장차 고구려의 두

             번째 임금이 되는 유리였다. 유리의 친할머니인 유화부인은 금와왕의 보살핌 속

             에 살았지만, 유리는 부여에서 쫓기는 신세였던 주몽의 아들인지라,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해설>  그런데 유리는 주몽의 피를 속일 수 없었던지 사냥을 좋아해서 어려서는 참새잡

             기를 즐겨합니다. 역사에 관심 없는 사람일지라도 아마 이런 일화는 들어보셨을

             겁니다.

낭독자  어느 날 한 부인이 물동이를 이고 있을 보고 장난끼가 발동한 유리가 새총을

            쏘았다.

<효과>  (새총 쏘고-물 항아리에 부딪치는)

낭독자   우리가 쏜 새총을 맞아 항아리에 구멍이 나고 말았다.

 

여자      아니, 이런 나쁜 놈을 봤나, 물동이를 깨다니! 아비 없는 자식이라 못 된 짓만

            배웠구나!

 

낭독자  우리는 자신의 장난이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곧장 진흙 탄환으로 쏘아 맞추어서

            물동이의 구멍을 메웠다. 집에 돌아온 유리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유리     어머니, 저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뭇 짐승들도 다 아비가 있는데 왜

           저한테는 아버지가 없다 하십니까?

 

예씨    으음…그 동안은 네가 아직 어렸기에 네 아버지를 알고 나면 안 좋은 일이 생길지

          몰라 숨겨왔단다. 이제부터 어미의 말을 잘 듣거라. 네 아버지는 천신의 자손이며

          하백의 외손자이시다. 부여 나라의 신하됨을 원통하게 생각하여 남쪽 땅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셨단다.

 

유리    어머니, 아버지가 임금이 되셨는데 자식이 남의 신하가 되어 살 수는 없지 않습니

          까. 빨리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셔야지요. 왜 이곳에 계십니까?

 

예씨    그것은 네가 풀어야 할 숙제가 있기 때문이다. 너의 아버지가 떠날 때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주몽    (에코)내가 감추어둔 물건이 있는데, 일곱 언덕 일곱 계곡의 돌 위에 선 소나무에

           있소. 이것을 얻은 자가 내 자식이오!

 

낭독자  유리는 온종일 산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그런 돌 위에 있는 소나무를 찾을 수

            가 없었다. 하루 종일 그 물건을 찾아 헤매고 돌아다니던 유리는, 너무 지쳐서

            돌아와 집 기둥에 기대었다, 그런데 기둥에서 어떤 슬픈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유리는 가만히 그 기둥을 살펴보았다. 기둥은 소나무로 만든 것이었고, 주춧돌이

            일곱 각이 진 것이었다.

 

유리    그래. 돌 위의 소나무는 바로 저 기둥이야!

 

낭독자  그래서 소나무 기둥에 난 구멍으로 손을 넣어봤더니 부러진 칼이 있었다, 그 칼을

            가지고 고구려로 달려가서 주몽에게 바쳤는데, 주몽이 가지고 있던 칼 조각과

            맞춰 보니 한 자루의 칼이 되었고 그 칼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해설>   <동명왕편>에 의하면 유리는 시조인 주몽 못지않게 신성함을 가진 인물로

             묘사됩니다. 햇빛을 타고 하늘을 나는 신통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요,

             아무래도 이런 부분은 고구려의 왕실이 하늘의 자손에 의해서 시작됐고 또 계승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신화연구를 오랫동안 해온 서영대 교수는, 중국에도 비슷한 설화가 있다고 얘기

             합니다. 양자강 하류 지역, 그러니까 오늘날의 항주, 소주 지역에 전해지는 설화

             라고 합니다.

 

*인서트-8.

(1:00:40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때 간장이라고 하는 아주 칼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칼을 잘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왕이 칼을 하나 만들어 바치기를 요구했습

니다.  그런데 그때 간장은 자기가 좋은 칼을 만들어서 왕에게 바치면 이 왕은 그런 칼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끔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예감을 합니다.  그래서

칼을 만들 때 아예 두 개를 만듭니다.  두 벌을 만들어 가지고 하나는 자기 집에 몰래 감춰

두고 하나는 왕에게 갖다 바칩니다.  아니나 다를까, 보검을 받은 왕은 이런 칼이 더 이상

생산되지 못하게끔 간장이라는 사람을 죽여 버립니다. 1:01:24)

<해설>  당시에 막야라는 그의 부인은 임신중이었는데, 간장은 죽기 전에 부인인 막야에

             게 일곱 모가 난 돌과 소나무 사이에 칼을 감춰 두었으니 아이가 태어나거든

             그 칼을 찾아 원수를 갚아달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그래서 훗날 그의 아들이

             자기 집 기둥 밑 주춧돌 위에서 그 칼을 찾아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기록들이 황당한 설화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그 자체가 당대

             사람들의 역사를 기술하는 한 방식이었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유리가 고구려에 도착해서 태자로 책봉된 때가 기원전 19년 4월인데, 바로 그 해

             에 주몽이 죽자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그 사실은 유리가 본래부터

             일정을 세력을 갖고서 고구려에 참여한 것이 아닌가 이런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어쨌든 유리가 왕위를 이어받자 부분노를 비롯한 많은 건국공신들도 유리를

             받들어 섬긴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를 세운 비류나 온조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인서트-9.

(14:28 고구려의 건국 신화에는 온조 비류 얘기가 나오지 않고, 백제의 신화에 나오고

있죠.  주몽의 아들이기 때문에 같은 혈통을 갖고 있는 고구려의 계통으로 보통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실 고구려의 신화 자체로만 본다면 온조와 비류라는 인물이

등장할 수 있는 공간이 없죠.  그러니까 이 신화는 고구려와 백제의 관련성을 보여주기는

하는데, 정확하게 실제적으로 온조와 비류가 주몽의 아들인지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죠.

관념적으로 고구려의 시조와 백제의 시조가 연관되었다고 하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볼 수 있습니다.15:17)

<해설>  다시 얘기하자면 유리가 아버지 주몽을 찾아 고구려로 왔을 때 이미 고구려에는

             비류와 온조라는 주몽의 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편에는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백제본기 온조왕 편의 첫머리

             를 잠깐 들여다 보겠습니다.  

낭독자  (F) 백제 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가 추모이다.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부여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다만 딸 삼형제가 있었는데 둘째딸을 주몽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주몽이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요 둘째 아들은 온조이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오자, 비류와 온조는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를 데리고 남쪽 지방

            으로 떠나니 백성들 중에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한산(漢山)에 이르러 살만한 곳

             을 살폈다. 비류는 바닷가에서 살자고 하나, 신하들이 말했다.

 

신하     생각해보건대, 이곳 하남(河南)의 땅은 북으로 한수를 띠처럼 두르고, 동으로는

           높은 산악에 이거하고 있으며 (이하 BG)서로는 큰 바다가 막혀 있어서…

 

<해설> 그런데 비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백성 일부와 함께 오늘날의 인천 지역인 미추

            홀로 가서 살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세웠다, 이런 내용

            입니다.  서영대 교수와 임기환 교수의 얘기를 차레로 들어보겠습니다.

 

*인서트-10.

(59:37 주몽이 몇몇 부하들을 거느리고 졸본 지역에 도착했을 때 주몽의 입장은 상당히

고단했을 것이고 고립되어 있는 입장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때 주몽을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그 지역 토착 세력의 딸이었던 소서노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서노

라고 하는 여인은 주몽이 건국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

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이 소서노의 자식이 바로 백제의 시조라고 하는 온조입니다.1:00:10)

 

*인서트-11.

(18:23 백제 건국 신화의 얘기죠.  온조 비류 얘기는.  고구려 건국신화 얘기는 아닌데.  

똑같이 주몽을 아버지라고 했기 때문에 한 가족의 일종의 건국사처럼 구성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혈통적으로 주몽이라는 한 인물이 있고 실제로 유리와 온조 비류라는

배다른 형제라는 인물들이 등장해서 실제로 나라를 만들었는지, 건국설화의 내용들이

그대로 하나의 역사적 사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죠.  어떤 역사적 사실을 상징적으로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인지 사실 그 자체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19:00)

<해설>  실제로 백제는 수도가 한성에 있을 때는 동명묘를 만들어서 동명에 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웅진으로 천도한 다음에는 동명묘의 제사기록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동명을 시조로 받드는 관념이 바뀐 게 아닌가 이런 추정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부분을 근거로 할 때, 만일에 고구려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로 편입돼 버린다면 백제의 건국 부분도 그 정체성을 상당히 훼손

             당할 여지가 있겠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유리왕은 옛 비류국의 왕이었던 송양왕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앞에서

             고구려에 복속된 각 지역들에게 자치권이 주어졌고 고구려라는 나라 자체가

             연방체제의 국가였다는 점을 말씀 드렸는데, 유리왕이 송양왕이 이끄는 집단과

             의 유대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 그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인 점으로 보아서도 그들

             집단이 무시 못할 자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점이 인정됩니다. 그런데 그 첫

             아내는 결혼한 지 1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러자 유리왕은 재혼을 하는

             데, 두 명의 여자를 동시에 맞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두 왕비는 서로 사이가 안

             좋았던 모양입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황조가(黃鳥歌)가 탄생합니다. 삼국사기

             의 그 대목을 들춰 보기로 할까요.

낭독자   (F)가을 10월, 왕비 송씨가 돌아갔다. 왕이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계실을

             삼았는데 한 사람은 화희(禾姬)이니 골천( 川)사람의 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치희(雉姬)이니 한족의 딸이었다. 두 여자는 서로 사랑을 차지하려 했으므로

             하목하게 지내지 못하였다. 왕은 양곡에 동궁과 서궁을 지어 각각 따로 살게 했다.

<해설>  그러니까 고구려 토착세력이라 할 수 있는 골천지역의 세도가 출신 왕비 이름이

             화희였고, 중국 사람, 즉 한족 출신의 왕비가 치희였다는 얘깁니다.

낭독자   (F)그 후 왕이 양곡으로 사냥을 떠나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해설>  사이가 안 좋은 두 아내를 남겨두고 그렇게 오래 집을 비었으니 문제가 생겼겠지

             요. 두 여인이 한바탕 말다툼을 벌이게 되는데,  

 

화희      너는 한(漢) 나라 가문의 비첩인 주제에 어찌 무례함이 이토록 심한가!

 

낭독자  치희는 부끄럽고 분해서 그 길로 도망쳤다.

 

유리왕  뭐라고? 치희가 도망을 갔단 말인가? 호오, 이런! 이럇!

<효과>  (말 타고 달리는)

 

낭독자  왕이 소식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쫓아갔으나 치희는 분함을 찾지 못해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왕이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 느끼는

            바 있어 노래했다.

 

유리왕  (한시 낭송)편편황조(翩翩黃鳥)

                  /자웅상의(雌雄相依)

                  /염아지독(念我之獨)

                  /수기여귀(수其與歸)

 

낭독자  훨훨 나는 저 꾀꼬리/암수 서로 정답구나/외롭구나 이내 몸은/뉘와 함께 돌아갈꼬

<해설>  유리왕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가로 알려진 이 사언사구의 한문 시가(詩

             歌)를 두고, 역사학자들은 물론 국문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해석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우선 이 시가는 단순한 서정시가가 아니라 당대의 사회현실을 반영한

             작품이니 서사시가(敍事詩歌)로 취급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두 아내의 단순한

             사랑싸움이 아니라, 화희와 치희로 상징되는 고구려 토착세력과 한군현 간의

            투쟁과 대립을 그린 노래라는 거지요. 임기환 교수의 얘깁니다.

 

*인서트-12.

(19:37 그 때 고구려 토착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화희와 한인으로 나오는 치희라는두 여인

을 맞습니다. 한인과 고구려 토착인이니까 아마. 고구려 건국했던 지역이 본래 중국의

현도군이 있던 지역이기 때문에 아마 일부 한인들이 이쪽으로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한인 집단과 원 고구려 토착 세력들과의 갈등 관계가 유리왕의 두 부인의 이름의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실제로 유리왕의 두 부인이 될 수도 있어요.될 수도 있는데.

그런 갈등 관계를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21:18)

<해설>  우리가 한용운의 시에 나타나는 '님'을 반드시 조국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단정

             지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황조가의 화희와 치희도 실제로 왕의 총애를 두고

             다투던 여인들일 수도 있겠지요. 좀 더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유리왕이

             치희를 뒤쫓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이런 한탄조의 노래를 부른 것은,  한나라의

             군현과 화해·공존을 모색하려던 자신의 시도가 좌절과 실패로 끝나자 유리왕이

             그 고뇌를 애절하게 노래한 시가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서영대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시죠.

 

*인서트-13.

(1:11:16 유리왕이 치희를 따라간 것을 정치적인 각도에서도 해석해 볼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한족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족 여인을 맞아들였고, 또 한족 여인이

도망가면서 그 여인을 굳이 찾으려고 했던 것도 이런 정치적 관계를 고려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대목에 있어서는 저는 오히려 유리왕의 포용력이라고 할까.  

어떤 부인도 다 포용하려고 하는 그런 사나이다움, 이런 걸 오히려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배경이 7월달입니다.  7월달인데, 7월달에는

꾀꼬리들이 잘 안 날아다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7월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는 이런 이야기를 제기하는 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1:12:03)

<해설>  유리왕을 신화적 인물로 보는 사람들은 이런 의견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신화적인 인물이 창작적인 시를 제작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시의 작자도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많은 제례의식 중에서

            남녀가 배우자를 선정하는 기회에 이런 노래를 불렀다는 견해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와 한군현 사이에는 어떤 방식의 교류가 있었을까요?

            임기환 교수의 얘깁니다.

 

*인서트-14.

(10:00 한군현, 주로 현도군이 될 텐데.  현도군에서 우수한 물자, 사치스런 물자들이 거기

들어왔고.  고구려나 이쪽 지역은 이 지역의 특산물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특산물들

하고 중국의 중국 문화하고 그런 문물들을 서로 교류하는, 교역하고 바꾸는 이런 내용들

을 갖고 있을 텐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됐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고요.  중국측 기록으로

보면 이런 게 있습니다.  고구려가 스스로 장성해져 가지고 고구려 국경 밖에, 중국 군현

하고 고구려 국경 지대에 책구루라는 것을 만들어서 거기서 교역이 이루어졌을 거다.  

이렇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10:42)

<해설>  그런데 한족을 대표하는 치희가 고구려 토착세력을 대표하는 화희에 의해서

             맥없이 쫓겨난 것을 볼 때 고구려에 대한 한나라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황조가 얘기가 나온 김에 황조가의 배경에 대한 해석을 한 가지만 더 소개할까요?

낭독자  (F)유리왕의 부인 중 화희의 '화'자는 한자로 쓸 때 논에서 재배하는 벼를 뜻하는

           벼 화(禾)자이고, 한족 출신의 치희는 꿩 치(雉)자를 쓴다. 따라서 화희가 치희를

           쫓아냈다는 것은 고구려의 경제 체제가 수렵경제생활 상태에서 농경경제생활로

           바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설> 물론 글자 하나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해서 역사를 해석하는 자세가 옳으냐, 하는

           문제는 남습니다만, 그 고대 시가를 어디까지나 문학 작품으로 본다면 해석이

           다양하다 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습니까. 청취자 여러분도 황조가에 더 숨은 뜻이

          있는지를 찾아서 나름대로 한 번 분석을 해보시죠.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고 넘어가지요. 유리왕이 수도를 졸본지역에서 국내성으로

          옮긴 시기는 황조가를 지었던 시기보다 한참 나중입니다.  따라서 황조가의 배경이

          되는 지역을 기념하려면 당연히첫 도읍지였던 졸본지역이 돼야 할 것입니다. 그런

          데, 현지에 다녀 온 서영대 교수의 얘기에 의하면 중국당국은 국내성이 있던 집안

          지역의 유적지에다 '황조가의 배경이 되었던 지역'이라는 팻말을 붙여놓고 관광객

          들에게 선전하고 있더라고 합니다.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인서트-15.

(1:09:58 고구려의 집안 지역을 갖다가 클로즈업을 시키면서, 여기에서 이런 역사적 사건

이 있었다고 하면 사람들에게 더 다가오는 부분이 많지 않습니까.  나중의 이야기입니다

만, 고구려의 동천왕이라는 왕이 어떤 여인하고 혼인해 가지고 동천왕을 낳는데요.  산상

왕이 여인을 만나는 과정의 이야기도 보면 산상왕이 돼지 따라가 가지고 주통천이라는 데

서 어떤 여인을 만나고 하는데.  그 주통천이라는 게 아무 근거도 없는데 집안에 보면 여

기가 주통천이다 이렇게 이야길 하거든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설화와 설화의 현장을 연

관시키면 사실성이 더 돋보이지 않습니까.  그런 걸 노리는 것 같습니다.1:10:41)

<음악>  (브릿지)

 

<해설>  주변의 작은 세력들을 통합하여 세력을 키운 유리왕은 추모왕의 신하였던 부분노

             를 보내서 서북쪽에 있던 선비국을 공략하여 항복을 받아냅니다. 그런데, 선비를

             속국으로 굴복시킨 그 전투에서 고구려는 대단히 특출한 병법을 사용합니다.

             유리왕 11년 여름 4월, 왕이 신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유리왕   선비가 자기네 땅의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려 하지않으며,  정세

             가 유리하면 나와서 약탈을 일삼고, 불리하면 들어가 수비를 하니 나라의 걱정

             거리로다. 만일 이들을 제거하는 자가 있다면 장차 큰 상을 주겠노라.

 

<해설>  그 때 부분노가 앞으로 나섭니다, 부분노는 시조인 주몽이 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으로 올 때 동행했던 개국공신이었습니다.

 

부분노  선비는 지세가 험준하며 사람들이 용감하고 우직해서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꾀로써 그들을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유리왕  꾀를 써서 굴복시킨다?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부분노  간첩을 만들어서 그 나라에 보내 거짓말을 하게 하되,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므로 겁이 나서 움직이지 못한다, 이렇게 소문을 냅니다. 그러면 선비가

            우리를 얕잡아보고 수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그 틈을 이용해서 정병을

            거느리고 사잇길로 들어가 산림속에 숨어서 그 성을 노리겠습니다. 이 때 대왕

            께서는 약간의 군대를 적의 성 남쪽에 출동시킨다면 적은 틀림없이 성을 비우고

            먼 곳까지 추격해 올 것입니다.

 

유리왕  그 때 부분노가 성을 접수하고나서 양쪽으로 협공을 벌이자, 이 계책이로군.

            부분노의 병법이 지혜로운 듯하니 곧 군사를 출동시키도록 하라!

<효과>  (군대, 말타고 진격하는)

 

낭독자  (F)선비의 군사들은 예상대로 성을 비우고 남쪽으로 진격해왔고 그 사이에 부분노

           는 성을 점령하였다. 왕께서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협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선비는 대책이 없고 힘이 다하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이 부분노의 공로를

           치하하여 상으로 식읍을 내렸으나 부분노는 사양하였다.

 

부분노  이는 대왕의 덕이 훌륭한 결과이옵니다. 저에게 무슨 공이 있겠사옵니까.

 

낭독자  (F)부분노가 상을 받지 않으매, 왕은 황금 30근과 말 열 필을 주었다.

 

 <해설> 유리왕이 선대 왕인 주몽의 신하였던 개국공신과 힘을 합쳐서 세력확장에 성공

             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선비의 항복을 받아낸 전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유리왕은 시조 주몽의 왕위를 이어받아 37년간이나 고구려를 다스리면서 대외적

             인 팽창을 지속하여 나라의 위상을 크게 높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불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부인 치희를 잃었을 뿐 아니라, 아들도 세 명이나 먼저 떠나

             보냅니다.

             기원 전 6년 정월-. 세력이 강대하던 부여국의 왕 대소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옵니다.

 

사신       아뢰옵니다. 우리 부여국의 대왕마마께서 고구려와 수교하기를 원하옵니다.

 

유리왕   이웃 나라끼리 화친을 맺자는 제의를 내가 어찌 거절하겠는가?

 

사신      그러면 마땅히 두 나라 왕실간에 질자를 교환해야 도리인 줄 아옵니다.

 

유리왕   수교를 하려면 마땅히 양국간에 태자를 인질로 교환해야지…      

              잘 알았으니 돌아가거라.   

 

<해설>  고구려로서는 당연히 그의 첫째 왕자였던 태자 도절을 보내야 했는데, 태자가

             인질로 가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유리왕 또한 도절을 아끼는 마음이 지극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이 아비 없이 자란  어린 시절을 경험했기 때문에 결국

             부여의 인질제의를 거절하게 되고-.

<효과>  (대규모 군마 달려오는)

<해설>  이에 앙심을 품은 부여는 그해, 11월 5만 군사를 동원해서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그 5만이란 군대의 규모는 크게 과장 된 것이라고

             임기환 교수는 지적합니다.

 

*인서트-16.

(30:09 그런데 이 삼국사기 기록에 보면 그때 부여가 고구려를 5만 군대를 동원해서 압박

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죠.  5만 정도의 군대를 동원하는 게 고구려 같은

경우에도 광개토왕 때 5만 군대를 동원하는 기사들이 나오는데, 이 시기에 부여가 5만을

동원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이런 부분들은 과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고구려가 압록강과 홍강 유역에서 나라를 만들어서 확장해 나갈 때 부여 내지는 고구려가

접하고 있는 부여 세력들하고 상당히 갈등 관계에 있었던 것은 삼국사기 기사를 통해서

짐작을 해볼 수 있습니다.30:49)

<해설>  다행히 큰 눈이 내려서 부여의 군대가 돌아가긴 했지만 고구려는 큰 위기를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리왕에게 더 큰 충격은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태자 도절이

            스무 살도 되기 전에 그만 세상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유리왕이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게 된 데에는 태자 도절을 잃은 슬픔을 달래고자

            했던 마음도 일부분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을 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유리왕이 왕위에 있는 동안에 이룬 가장 큰 업적과 사건은 아마도 수도를 졸본성

             에서 국내성으로 옮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초기 도읍이 있었던 환인지역과 유리왕 때 옮겨간 집안지역을 놓고

             볼 때 수도를 옮겼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국가를 발전시켜 나아가는 데 어떤 이점이 있었을까요?

 

*인서트-17.

(24:30 실제 가 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어요.  환인도 사실은 넓은 지역이지만, 집안은

그보다 조금 더 넓은 지역이라고 볼 수 있고.  또 실제 환인보다는 집안이 훨씬 따뜻합

니다.  또 집안이 갖고 있는 장점 중의 하나가 압록강수를 이용해서 바닷길로 진출할 수도

있고.  이 수를 이용한 물자의 유통도 용이하게 되고.  또 압록강을 건너 가지고 한반도

쪽으로 남하하기도 유리하고.  지리적으로나 교통로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국내성이

환인보다 유리한 지역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에요.25:12)

 

*인서트-18.

(1:19:20 고구려 초기 서울이었던 처음 서울이었던 환인현 지역, 오녀산성 지역은 방위는

편리하지만 산세가 험하고 해서 국가를 경영해 나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두 번째 서울이었던, 지금 길림성 집안 지역이고요, 당시 명칭은 국내성

입니다만.  이 지역은 압록강이라는 넓은 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교통도 괜찮고. 강을

통해서도 나갈 수도 있고 육지로도 연결이 잘 되는 곳이고요.  한반도 쪽으로 나갈 수

있는 곳이고.  비교적 평야도 조금 있고.  이런 것들이 고구려가 결국 발전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 수도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그쪽으로 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1:20:05)

<해설>  임기환 교수와 서영대 교수 모두 졸본성이 있던 환인지역보다는 나중에 국내성

             을 세우게 되는 집안 지역이 훗날 광대한 영토의 고구려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운영하기에 여러 가지 측면에서 조건이 유리했다고 입을 모읍니다. 그런데 삼국

             사기에는 수도의 입지를 정하는 데 있어서, 제사 지낼 때 제수로 쓰기 위해서

             기르던 돼지가 결정적인 역할 했다, 이렇게 설화풍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얘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음악>  (엔딩)

*시그널 + 클로징

 

 

 

                        나오는 사람들

 

주몽                         윤동기

송양왕(비류국)          박상일

여자                         서지연

우리(10대)                박찬희

예씨(주몽의 본부인. 유리의 모)  송정희

신하(백제)                김대중

화희(젊은 왕비. 유리의 부인)     권연희

사신(부여국)               진웅

유리왕                        유호한

부분로                        황원

낭독                           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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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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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삼신(환인-환웅-단군) 신앙의 성지 히코산 신궁 일본 규슈 후쿠오카현에 위치한 히코산英彦山은 고대부터 ‘신神의 산’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영산靈山이다. 히코日子라는 말은 원래 태양의 아들, 즉 하늘의 아들을 뜻한다. 예로부터 수험...  
20 환단고기 완역본 홍보 영상 file 태일[太一] 612 2013-01-01
환단고기 완역본 홍보 영상  
19 광개토왕 비문 전문 해석[펌] file 태일[太一] 819 2012-12-02
옛적에 시조이신 추모왕이 고구려 나라를 열었다. 추모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요, 모후는 하백의 따님이셨다. 추모왕은 알에서 태어나 세상에 내려오시니 성덕이 높았다. 惟昔始祖 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德 추모...  
18 라디오 다큐<제4편> 국내성 천도, 그리고 부여 정벌 file 태일[太一] 727 2012-12-02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4편> 국내성 천도, 그리고 부여 정벌 극본-이상락 연출-이상여 [다운로드] *시그널 + 타이틀 <효과> (개업하는 집 고사 지내는-사람들 웅성) 남자1 아이고, 그 돼지 머리 한 번 탐스럽게 생겼다. 아, 잠깐, 절하기 전에 막걸리부...  
» <제3편> 신화속에서 걸어나와 역사를 만든 유리왕 file 태일[太一] 532 2012-12-02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3편> 신화속에서 걸어나와 역사를 만든 유리왕 극본-이상락 연출-이상여 [다운로드] *시그널 + 타이틀 <해설> 안녕하십니까.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의 김연갑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동명설화...  
16 <제2편> 하늘의 아들 주몽, 나라를 세우다. file 태일[太一] 566 2012-12-02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2편> 하늘의 아들 주몽, 나라를 세우다 [다운로드] 극본-이상락 연출-이상여 *시그널 + 타이틀 김부식 (임금에게 아뢰는)아뢰옵나이다. 생각하옵건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해동3국이, 나라를 세워 지나온 자취가 장구하여 마땅...  
15 광개토태왕 1부 - 동방의 알렉산더, 고담덕(高談德) file 태일[太一] 262 2012-11-24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한 왕, 광개토태왕 그의 진정한 꿈은 무엇이었나? 동으로는 연해주, 서로는 중원에 육박하고 남으로는 김해에 이르렀던 고구려대제국을 이룬 왕. 그가 꿈 꾼 것은 고구려가 이끄는 삼국의 대통합, 나아가 삼국의 힘으로 동아...  
14 광개토태왕 2부 - 팍스 코리아나(Pax Koreana), 고구려에 의한 평화 file 태일[太一] 270 2012-11-24
그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은 어디인가.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대 제국 고구려의 '태왕' 고구려의 하늘 아래, 모든 나라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만든 광개토태왕 대륙의 정복자를 넘어 민족의 미래를 개척한 광개토태왕의 비전을 확인한다.  
13 동영상 강의-예언 '상제님강세소식-진인도통연계' 태일[太一] 305 2008-11-15
동영상 강의-예언 '상제님강세소식-진인도통연계' 하나님 강세소식-진인도통연계 세계종교 통일의 도맥, 진인도통연계 ○ 『진인도통연계(眞人道通聯系)』는 중국 명나라 때(1583년) 진사 벼슬을 했 다고 전해지는 「주장춘(朱長春)」 선생의 대예언입니다. 이...  
12 구약성서의 예언 태일[太一] 250 2008-11-06
 
11 [영상] SBS 백만불 미스테리 다빈치코드  file 태일[太一] 307 2008-10-31
[영상] sbs 백만불 미스테리 다빈치코드  SBS 백만불미스테리, 다빈치코드를 소개하고 있다.  
10 충격대예언_성말라카이 태일[太一] 266 2008-09-16
 
9 고대의 예언들을 통해 본 미래[동영상] 태일[太一] 296 2008-09-16
고대의 예언들을 통해 본 미래[동영상] . ...^_^...  
8 아틀란티스의 침몰 (다큐) 태일[太一] 258 2008-09-16
 
7 충격대예언 - 노스트라다무스 (동영상) 맑은바람 418 2008-09-15
충격대예언 - 노스트라다무스 (동영상) 이 내용을 보시면서 마지막으로 가장 의문으로 남는 것은 "구원의 방주 정체는 무엇일까" 일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신분은 아래의 방법으로 연락주세요^^ <<..소책자클릭,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6 삼신 사상에 관한 동영상 맑은바람 264 2008-09-15
삼신 사상에 관한 동영상 삼신 사상에 관하여.. ...^_^...  
5 마야인의 예언 맑은바람 291 2008-09-15
마야의 천문학은 고대 이집트의 기하학이나 그리스 철학에 비견될 만큼 지적으로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망원경이나 이렇다할 도구없이도 마야의 천문학자들은 태음월의 길이를 29.53020일로 계산한다. 이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 태음월의 길이 29.530...  
4 파티마 제3의 비밀(성모마리아의 예언)-mbc방영 맑은바람 278 2008-09-15
 
3 미래탐험-인류최후의날 맑은바람 247 2008-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