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께서 하루는 공사를 보시며 글을 쓰시니 이러하니라.
不受偏愛偏惡曰仁이요 不受全是全非曰義요, 不受專强專便曰禮요 不受恣聰恣明曰智요, 不受濫物濫欲曰信이라
치우치게 사랑하고 미워하지 아니함이 참된 어짊(仁)이며, 모두 옳고 모두 그르다는 말을 듣지 않음이 바른 의(義)를 행함이니라.
억지로 시키는 강압도 아니고 형편에 따라 적당히도 하지 아니함이 옳은 예(禮)이며, 스스로 총명한 체하지 아니함이 성숙한 지혜로움(智)이니라. 물욕에 빠지지 않고 신의로 사는 것이 믿음(信)이니라. (도전 8:48)
유교의 기본사상을 성(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용은 성에 대하여 "정성이란 하늘의 도요, 정성 되게 하는 것은 사람의 도다"(誠者 天之道 誠之者 人之道)라고 했는가 하면
"정성(誠)됨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성(性)이라 하고, 밝아짐으로 말미암아 정성해짐을 교(敎)라 한다.
그리고 정성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곧 정성되어진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라고 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내면(內面)으로는 지성(至誠)으로 선(善)을 추구하여 인간의 본성(本性)을 찾고 ,
외면(外面)으로는 예를 갖추어서 부모에 효도하고 친족에게 화목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가장 중요한 것이 중용이니 그 길은 지성(至誠)에 있다.
주희(朱熹)는 중용(中庸)에 대해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정도에 알맞은 것이 중이요, 언제나 바르고 일정한 것이 용'이라 풀이하였다.
어느 때 공자의 제자 자공이 "사(師)와 상(商)은 누가 더 현명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사는 재주가 지나치고 상은 모자란다" 하였다. 이에 자공이 "그러면 사가 낫습니까" 하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과한 것은 미치지 못함과 같은 것이다(子貢 問師與商也 孰賢 子曰 過猶不及)"라고 하였다.
중용이라는 중(中)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글자 그대로 가운데를 가리키는 산술적인 비례에 있어서의 중이거나 양적 물적인 가운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용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희로애락이 발(發)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이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희로애락에 애오욕(愛惡慾)을 더하여 이를 칠정(七情)이라 하는데 앞에서 말한 측은한 마음(仁)과 수오한 마음(義) 그리고 공경한 마음(禮)과 시비하는 마음(智)인 이 사단도 역시 성의 발현이요, 마찬가지로 정(情)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사단은 순선(純善) 무악(無惡)한 것이고 칠정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성리학자들은 이기 이원론(理氣 二元論)에 입각하여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구분하여 본연지성은 순수한 이(理)이므로 그가 발하였을 때에는 선하기만 하고 악은 없는 것이요,
기질지성은 이(理)가 기(氣)속에 타재(墮在)되어 기의 청탁수박(淸濁粹駁)의 영향을 받아 그가 발하였을 때에는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학자에 따라 구구한 논리가 전개되어 왔다.
우리 나라의 성리학자로 유명한 이퇴계(李退溪)선생은 '이기호발(理氣互發)이란 우주관에서 사단(仁, 義, 禮, 智)은 이(理)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고(理發氣隨),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기에 타는 것이다'(氣發理乘)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이율곡(李栗谷)선생은 견해를 달리했다. 그는 사단과 칠정을 이발과 기발과 같이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칠정 중에서 그 선한 것을 택한 것이 사단이라 하였다.
주희는 희로애락이 혼연(渾然)히 중(中)에 있어서 미처 사물에 자극 받지 않았을 때에는 일편에도 기울지 아니하고 또한 과(過)하지도 못 미치지도 않았기 때문에 중이라 하였다.
그러한 중이 어떤 사물에 접촉하게 되면 이 희노애락의 정(情)이 발생하게 되어 과불급(過不及)이 생기기 쉽고 올바른 판별을 못하여 편중하고 애착(愛着)에 걸려 적절한 데에 맞지 않은 경우가 생기게 된다.
그때에 하늘에서 받은 본연의 성(性)을 그대로 중절(中節)시키는 것 즉, 절도에 맞게 하는 것을 화(和)라고 하였다. 이 중화를 하기 위하여는 교(敎)가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하였다.
배우지 아니하고는 분별을 할 수가 없으니 순선무악한 본연의 성품이 사물에 접촉하였을 때에 중절할 수 있는 식견이 없으면 칠정에 얽매여 화(和)를 이루지 못하고 악으로 빠질 수밖에 없게된다.
이것을 대학(大學)에서 말하기를
"명덕(明德)을 천하에 밝히려면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려면 먼저 그 집안을 바로 잡아야 하고, 그 집안을 바로 잡으려면 먼저 그 몸을 닦아야 하고, 그 몸을 닦으려면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면 먼저 그 뜻을 성실히 하여야 하고, 그 뜻을 성실히 하려면 먼저 그 앎에 이르게 하였으니 앎에 이르게 하려면 사물을 규명함에 있다.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齋其家 欲齋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 在格物)"라고 하였다.
여기서 사물을 규명한다는 격물(格物)에 대하여 주희는 '사물의 이치를 추구하여 그 지극한 곳에 이르지 않은 데가 없이 하려는 것이다' 라고 풀이하였다. 따라서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출발점이 바로 격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라고 본다.
제가(齊家)에서 평천하에 이르는 길이 오직 수신(修身)에 있다고 볼 때에 그 수신은 또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비롯됨을 역설하였다.
격물(格物) 없이는 치지(致知)가 되지 아니하고 치지 없이는 사물의 선악사정(善惡邪正)을 밝힐 수가 없다.
사물의 선악사정이 밝혀진 다음에는 칠정에 구애됨이 없이 그 뜻에 성실하여야만 선을 택하고 악을 버릴 것이요, 정(正)을 취하고 사(邪)를 버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선설(性善說-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연의 성은 선하다는 설)에 바탕을 둔 중용의 도이다.
(참고) 그러나 격물로써 궁극적인 치지(致知) 즉, 우리 증산도식으로 말하면 만사지(萬事知)의 경계는 이치적인 추구에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연의 성(天性 - 天心)을 깨달았을 때 진정한 중용과 치지의 경계에 들어간다.
喜怒哀樂하는 정이 머물러 있으되 충만하여 안으로 그득히 넘실거리니 中이요, 밖으로 표출하되 절도에 맞아 유유히 자적하니 和다. 이 두 靜과 動이 섭리(攝理)를 이루어 中和요, 中庸이니 여기에 극진하면 天地가 제 자리에서 평화롭고, 만물이 이 가운데에서 生育된다. 바로 치우침이 없는 참진리가 이에 있는 것이다.
과연 유가의 그 누구가 정일집중(精一執中)으로 본연의 性을 득하여 진정한 중용의 경계에서 건중건극(建中建極)을 했는가? 그들이 말하는 고대의 聖神과 聖君의 진정한 도통(道統) 전수는 도심(道心 - 眞性)의 근본자리를 깨달은 곳, 진정한 중용에서 나오는 것이지, 격물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유교가 부패('儒는 腐儒니라')하는 단초가 시작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