情與性相對. 情者性之動也, 在心裏面, 未發的是性. 事物觸著, 便發動出來底, 是情. 寂然不動, 是性.
感而遂通, 是情. 這動底, 此是就性中發出來, 不是別物. 其大目, 卽爲喜怒哀懼愛惡欲七者. 孟子又指惻隱, 羞惡, 辭讓, 是非, 四端而言, 大底都是情.
性中有仁, 動出爲惻隱, 性中有義, 動出爲羞惡, 性中有體與智, 動出爲辭讓是非. 端是端緖, 裏面有是物, 其端緖便發出從外來.
性과 情은 서로 상대를 이룬다. 情은 性이 움직인 것이다. 사물에 접촉해서 발동하여 나오는 것이 情이다.
적연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寂然不動)이 性이다(佛家의 표현으로 본래면목本來面目 즉, 본래의 나를 性이라 한다).
느껴 통한 것(感而遂通)이 情이다. 움직이는 것은 性 속에서 나오는 것으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 큰 항목은 희노애구애오욕이라는 일곱가지가 있다. 맹자는 측은해하는 것(惻隱),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것(羞惡), 사양하는 것(辭讓), 시비를 가리는 것(是非), 이렇게 사단을 이야기 하였다. 대체로 이것들은 모두 정이다.
성(性) 속의 仁이 움직여서 나오면 측은이 되고, 性 속의 義가 움직여서 나오면 수오가 되고, 性 속의 禮가 움직여 나오면 사양되고, 性 속의 智가 움직여 나오면 시비가 된다.
단은 실마리이다. 안에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그 실마리가 발동하여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참고) 주역 [계사전]의 주석을 단 주희는 말하기를
"인간으로서 쉽게 알 수 없는 신(神)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천지와 덕을 똑같이 하는 聖人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이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감통(感通- 위의 感而遂通의 준말)의 지극에 도달 할 수 있게 되고,
감통은 무심(無心)으로 하는 것이며 보통사람이 고민하여 감통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라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