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 선생 "일제 호적에 이름 올릴 수 없다"
며느리 이덕남 여사 "목숨까지 내주며 사랑했던 조국
가장 늦게 인정받다니 아이러니… 괜한 일 했다 하시진 않을런지…"
"아버님, 좋은 소식이 있어요. 아버님이 대한민국 국민임을 확인하는 호적을 받게 됐어요. 1912년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거부하신 지 97년 만이네요. 목숨까지 내주며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했던 분이 가장 늦게 조국의 인정을 받는다니, 참 아이러니네요. 그래도 이제 '무국적' 독립운동가라는 말은 사라지겠지요. 마침 3ㆍ1운동과 4ㆍ13 임시정부 수립이 90돌을 맞습니다. 호적을 받으면 바로 누워 계신 곳(충북 청원군)에 달려가겠습니다. 잠깐만요, 아버님 얘길 들으러 손님이 왔네요."
정부는 4월13일 임정 수립 90주년 기념식에서, 무호적 상태로 숨진 독립운동가들에게 호적(가족관계등록부)을 새로 만들어 전달한다. 누구보다 이 순간을 기다린 이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ㆍ1880~1936)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66) 여사다. 수 십 년을 뛰어다니며 이번 조치의 산파 역할을 해낸 그는 "내 생전에 이 일이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여사는 1967년 단재의 아들인 고 신수범(91년 작고)씨와 결혼했다. "시아버님 함자 정도만 알았지, 뭐 하셨던 분인지 전혀 몰랐어요. 당시만 해도 단재가 지금처럼 조명 받지 못했으니까요." 몇 년 뒤 어느날, 남편은 기관에 쫓기고 있다며 2만원을 쥐어주고 도망치라고 했다. "정신 없이 기차를 타고 가다가 가만 생각하니 남편이 '머리에 뿔 달렸다는 빨갱이' 간첩이구나 싶었어요. 속고 산 게 억울해 그 길로 돌아가 따졌지요." 그제서야 남편은 진실을 털어놓았다. 남편이 쫓긴 건 북한에서 발행된 단재의 소설 < 꿈하늘(夢天) > 을 일본을 통해 전해 받은 탓이었다. '독립운동가' 단재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70년대 초 아이를 낳고 호적에 올리려 관공서를 찾은 그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남편이 사생자시네요?" 직원은 '私生子'라고 분명히 적힌 남편의 호적을 가리켰다. "너무 당혹스러워 등을 돌려 나온 뒤 남편에게 또 따졌죠. 그렇게 훌륭한 분이라면서 호적도 없다니…." 그러나 어두웠던 시절, 분노 이상은 부부의 몫이 아니었다.
이 여사는 80년대 중반부터 팔을 걷어붙였다. 남편과 함께 공무원들을 만나고, 국회 언론 등을 상대로 단재의 호적 회복을 호소했다. 단재 관련 자료도 열심히 모았다. 그러는 사이 단재처럼 일제의 호적을 거부하다 광복 전 숨져 호적도, 국적도 없는 독립운동가가 300여명에 이른다는 것도 알게 됐다. 국회에서 여러 차례 법률 개정안이 발의됐다가 흐지부지 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정부 입법으로 호적 창설의 길이 열렸다. 생존자를 기준으로 작성되는 호적에
독립유공자를 위한 예외 조항을 둔 것이다.
그는 이제 또 다른 꿈을 꾼다. 지금껏 모은 자료로 단재기념관을 만들고, 언젠가는 단재의 뜻을 이을 교육기관도 세우고 싶단다.
"아버님, 손님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묻더군요. '단재가 살아계시면 기뻐하셨겠지요?' 그런데 문득 괜한 일 했다고 하시지 않을까 걱정이 됐어요. 뤼순(旅順) 감옥에서 눈을 감는 순간까지 아버님께서 그리던 조국이 지금 이 모습은 아닐 것 같아요. 남북으로 갈린 것도 모자라, 그 안에서 서로 편 갈라 으르렁대는 모습을 보시면 뭐라 하실까…. 그러고 보면 이건 저를 위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