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단군세기> 8세 단군 우서한(혹은 오사함이라고 한다) 재위 8년 7년 갑인에 세발 달린 까마귀가 궁중으로 들어 왔는데 날개의 너비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환단고기 북부여기 상> 시조단군 해모수 재위 45년 해모수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이라 할 만하였다. (중략)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의 칼을 차시며 오룡의 수레를 타셨다.
환단고기 삼신오제본기> 원화는 여랑을 말하고 남자를 화랑이라 하며 또한 천왕랑이라고도 부르니, 황제의 명령에 의하여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를 하사 받는다. 오우관을 쓸 때에는 의식이 있었다.
환단고기 신시본기> 자를 효양, 축을 가다, 인을 만량, 묘를 신특백, 진을 밀다, 사를 비돈,오를 융비, 미를 순방, 신을 명조, 유를 운두, 술을 개복이라 한다.
우주변화의 원리 오행과 운> 水는 본래 亥子丑의 삼근, 즉 변화성과 자동성과 조화성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영원성과 자동성과 변화성이 있는 것인즉 이것은 탈레스의 사상과 동일한 것이다. 君이란 뜻은 주동력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위가 바로 君位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子位에서 살펴보면 군화는 자위에서 午位에 이르는 사이의 화를 칭한 것이다. 수기의 발산이 끝나는 때가 수의 종점인 동시에 火의 위다.
한민족의 뿌리와 미래 / 다음 카페>
午는 烏와 음이 같으면서 상징하는 것이 같다. 고대 한민족의 신교에서는 오라는 것은 목화토금수 오행 중 화(火)로서 광명이고 또한 군왕의 상징이다. 그런데 午는 오행의 색깔로 보았을 때 붉은 색인데 烏는 검정색이다. 그 차이는 무었일까. 불인 午는 그 바탕을 해자축의 물에 두고 있다. 그래서 오는 세 개의 발로 서고 있는 것이다.
타오르는 불을 자세히 보면 겉은 붉은색을 띠지만은 중심 속은 검은 빛깔을 띠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午의 붉은 색은 겉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의 색이고 烏의 검은색은 불의 중심에서 숨쉬고 있는 불의 생명인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 고분벽화속 삼족오 그림은 붉은 태양안에 검정색을 띤 세발달린 까마귀로 나타나는 것이다.
환단고기 신시본기 십간십이지지의 내용은 한민족의 고대신앙인 신교의 우주관을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인데, 십이지지를 새가 날아오르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 새는 삼족오로서 광명속에 깃든 진리의 새이며 생명, 조화, 지혜를 상징하는 새로서 영생불사하는 신조(神鳥)인 것이다.
그리고 신교의 수호자 화랑들은 천왕랑을 스스로 자처하였고, 까마귀 깃털을 머리에 꽂는 의식 속에서 인간 세상을 밝혀주는 태양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신교의 가르침을 받들어 심신을 수련하고 세상을 광명시키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그러므로 환인 환웅 단군 해모수 고주몽 광개토대제 연개소문 을지문덕 같은 분들은 모두 신교(神敎)의 수호자로서 인간세상을 개명시키는데 앞장서셨던 분들이다.
신용하의 새로쓰는 한국문화]<6>고구려 "태양三足烏"유물>
진파리 7호 무덤에서 나온 ‘해뚫음무늬 금동장식품’ 사진. 중앙에 《고구려 문화 유물에는 태양(해) 안에 세발까마귀를 넣은그림이나 조각이 여러 점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진파리 7호 무덤에서 나온 ‘해뚫음무늬 금동장식품(日光透彫金銅裝飾品)’을 들 수 있다.
이는 왕의 장식품으로 추정되는데 중앙의 구슬을 박은 두 겹의 태양 동그라미 속에 황금빛 ‘세발까마귀’를 불타오르듯 절묘하게 넣었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가 북한에서 국보를 빌려 서울에서 전시하고 있다.‘세발까마귀 태양’(또는 ‘태양 세발까마귀’·太陽三足烏)은 이 밖에도 고구려 고분벽화 중 각저총(角抵塚), 오회분(五회墳) 4호묘, 덕화리 1, 2호분에도 그려져 있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1974년 첫 발굴보고서가 나온 중국 랴오닝(遼寧)성 차오양(朝陽)지구 원태자(袁台子) 벽화묘에도 ‘세발까마귀 태양’이 1점 그려져 있는데, 중국학자들은 선비족의 한 갈래인 모용선비(慕容鮮卑)의 무덤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흉노족의 유물 그림에도 ‘세발까마귀 태양’이 1점 있었다.
세계고대문명의 신앙에 까마귀를 숭상한 흔적은 몇 곳에 보인다. 예컨대 중국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의 ‘양오(陽烏: 태양까마귀)’가 그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때의 ‘태양까마귀’는 모두 ‘두발(二足)’까마귀였다. ‘세발까마귀(三足烏) 태양’은 오직 고조선문명권의 원민족과 그 후예들에게만 있었다.
왜 실물까마귀에는 없는 ‘세발’인가? ‘세발까마귀 태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비밀을 푸는 열쇠는 국내고문헌에는 아직 없고, 산둥(山東)반도에 기원전 약 20세기경 살았던 소호(少昊)족 설화에 남아있다. 전설 요지는 다음과 같다.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세발까마귀. -동아일보 자료사진
①태양(해)이 돋는 곳은 산둥지방으로부터 바다 건너 동쪽 양곡(暘谷)이란 곳이다.(한반도 또는 랴오둥반도의 어느 곳을 가리킴)
②양곡의 통치자는 천제(天帝)인 제준(帝俊)인데, 10개의 아들 태양을 두었다. 그는 10개의 태양을 번갈아 하나씩 이어서 떠오르게 하여 세상을 알맞게 환하고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③10개의 태양들은 모두 ‘까마귀’를 싣고 있었는데, 모두 ‘세발까마귀’였다.
④10개 아들 태양들은 번갈아 뜨고 지는 똑같은 일의 반복에 싫증을 느껴서, 부모 몰래 동시에 떠올라 한꺼번에 10배의 혜택을 주기로 하였다. 이에 요(堯)임금 때 10개 태양이 동시에 떠올랐다. 세상은 10배 혜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갑자기 너무 뜨거워서 동식물이 타 죽어 갔다.
⑤요임금은 놀라 무당을 부르는 등 백방으로 대책을 세워보았으나 효력이 없었다. 요임금은 결국 바다 건너 동쪽 천제(天帝)에게 도와달라고 간청하였다.
⑥천제 제준은 10개 아들 태양들에게 훈계했으나 아들들은 아버지 제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제준은 활을 매우 잘 쏘는 예(예)를 내려보내 요임금을 도와서 10개 아들을 징벌하도록 하였다.
⑦‘예’가 요임금을 도우러 내려와 보니 10개 태양의 장난으로 만물이 타 죽어가고 있었다. ‘예’는 분개하여 쩐瑛?심장을 겨누어 활을 쏘았다. 태양은 예의 화살에 명중되어 땅에 떨어졌는데, 달려가 보니 화살에 심장이 꿰뚫린 태양들은 황금빛의 ‘세발까마귀 태양신(太陽神)’들이었다.
⑧요임금은 태양이 하나는 남아있어야 알맞게 세상을 따뜻이 비출 터인데, ‘예’가 10개 태양을 모두 쏘아 떨어뜨릴까 염려되었다. 그래서 요임금은 예의 화살통에서 화살 1개를 뽑아 감춰버렸다. 이 때문에 ‘예’는 9개 태양만을 떨어뜨리고 1개 태양은 남기게 되었다.
⑨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예는 고국의 천제에게로 돌아가려고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천제 제준은 9개 태양을 징벌만 하지 않고 죽여버린 사실에 진노하였다. ‘예’의 화살에 죽은 9개 태양은 제준의 아홉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제준은 ‘예’가 고국에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⑩‘예’는 할 수 없이 지상에 남아 요임금을 도와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물들을 퇴치하였다. 사람들은 기뻐서 요임금을 천자로 추대했는데, 이는 ‘예’의 도움에 의거한 것이었다.
소호족의 이 전설은 ‘9이(九夷)’라고 부르던 ‘동이(東夷)족’과 하(夏·고중국)족이 대결했던 고대초기에 하족이 동이족을 무찔러 나라를 보전한 설화라고 중국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공자도 동이를 ‘9이’라고 말하였다. 이 9이가 아홉 개의 ‘세발까마귀 태양’으로 묘사된 것이다.
‘세발까마귀 태양’은 유일하게 남은 ‘태양(해) 3신(神)’의 상징임을 여기서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태양 3신’은 어떤 신일까? 박은식(朴殷植)은 고조선의 국교는 삼신교(三神敎·神敎)라고 하면서, 3신은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다. 고조선 사람들과 그 후예들에게 3신은 생명을 주고 가호하는 신이었기 때문에 자식을 낳으면 반드시 3신에게 제사하고 고하는 의식과 관습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 ‘세발까마귀 태양’ 또는 ‘태양 세발까마귀’는 태양 3신이며, 곧 환인 환웅 단군임을 알 수 있다. 이 ‘태양3신’ 신앙은 고조선 문명권에 속한 모든 부족들과 원민족들이 받아들여 공유한 신앙이기도 하였다. 광개토왕비문은 고구려시조 동명왕이 천제(天帝·단군의 뜻번역)의 후손이라는 설명에서 시작하였다.
이 3신 신앙은 불교가 고구려 등에 수입되어 국교의 지위를 점할 때까지는 지배적 신앙이 되어왔다가 그 후는 민간신앙으로 남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한양대 석좌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