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4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 돌아오는 9월4일은 간도를 빼앗긴 지 꼭 100년이 된다. 우리 세대에서 ‘되찾아야 할 우리의 땅’ 간도(間島)를 찾지 못하면 영원히 잊혀지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 9월4일은 국치일로 남게 될 것이다. 간도(間島)란 무엇인가. 갈수록 낯설게 느껴지는 이 곳은 지금 중국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땅이며 우리의 영토이다.
설령 간도협약이 유효하더라도 당사국인 청-일간에만 효력이 발생하며 의도적으로 배제된 대한제국에는 아무런 효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정당한 권리없이 점유하고 있는 중국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해야 한다. 간도(間島)문제 정부 ‘천하태평’…정치인들도 무관심 하지만 역대 정부나 정치권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천하태평이다. 그동안 역사와 영토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보더라도 이런 우려가 절실히 드러난다. 굴욕외교로 비난을 샀던 1992년 한·중수교 당시에도 우리 정부는 일부에서 제기했던 ‘간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넘어갔다. 특히 2004년 1월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가 불거졌을때도 “중국의 역사왜곡 행위를 정치문제화하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저자세를 취했던 것도 사실이다. 일본과 비교하면 더욱 분통이 터진다. 일본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 누구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는 독도와 동해에 대해서도 50년이 넘도록 끈질기게 이의제기를 해오고 있고, 특히 독도와 관련된 사안이라면 아주 사소한 문제에도 사사건건 간섭하고 항의를 해오고 있다. 이는 독도 영유권과 독도가 한국땅으로 굳어지는 것을 저지하고, 국제법상 영토시효론에 근거해 유사시 연고권을 빼앗으려는 계산된 행동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이처럼 일본과 중국은 벌써 수십년전부터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철저히 계산된 준비를 해오고 있는 반면, 우리 정부는 ‘독도는 우리땅’이라며 단순 대응으로 넘어가려고만 하고 있다. 간도 등 고구려사 문제도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냥 덮어버리려 하고 있다. 더욱이 국민의 안위와 국가보전에 필요한 지식을 갖춰야 할 정치인들 대다수는 역사적 무지와 무관심속에 정권의 치적을 쌓는 데에만 급급하고 국가의 미래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또한 2004년 서울시장 재임시절 ‘간도’ 문제에 대해 “한반도 문제와 관련 중국의 영향력과 역할이 너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정면대결을 피하고 싶을 것”이라고 당시 정부를 비난했었다. 그러면서 “역사와 영토는 타협할 사안이 아니다”며 “(역사와 영토는) 국가적 중요이슈이고 이는 일본의 교과서 역사왜곡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간도되찾기운동본부 육락현 회장은 “간도영유권의 중요성은 다가 올 통일시대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위상”이라며 “우리정부는 조선족이 해체되기 전에 간도영유권을 분명하게 주장해야 한다”고 밝혔다. 육 회장은 이어 “정치인들도 선거철 등 특정일에만 나라위하는 척 하지말고 자발적인 국민운동에 동참해야 할 것”이라고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간도(間島)는 왜 우리땅인가 첫째, 원래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선이 아니었다. - 우선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표시한 여러 지도들이 간도와 우리땅임을 증명하고 있다. 프랑스인 지도 제작자 레지는 비망록에 “봉황성의 동방에는 조선국의 국경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조선정계비구역약도(규장각15504)’와 ‘백두산 정계비도(규장각26676)’, ‘로마 교황청의 조선말의 조선지도’(1924년 제작) 등 당시의 수많은 지도들은 동간도를 토문강 동쪽 지역으로 표시하고 있으며, 압록강 북쪽의 봉황성 일대에서 두만강 위쪽의 연길로 이어지는 구격이 표시돼 있다. 이런 자료들로 살펴볼 때 적어도 1909년 간도협약 이전까지는 이같은 국경선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우리가 간도를 선점적으로 개간했다. - 간도지역은 조선과 청나라가 맺은 강도회맹에 의해 출입이 금지된 봉금지역으로 양국이 공동관리하는 무주지였다. 무주지는 국제법적으로 선점하여 개간하는 쪽이 영유권을 가지게 되는데 간도에 대한 우리의 개간은 무주지 선점이론에 의한 영토획득의 의미가 있다. 셋째, 조선이 실질적인 행정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 조선은 1900년과 1903년에 서간도와 동간도(북간도)를 행정적으로 각각 평안북도와 함경도에 편입시켰으며 세금을 징수하여 행정과 군인훈련비로 충당했다. 이런 사실들은 조선의 행정력이 간도에도 똑같이 미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간도는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인가 간도는 좁은 의미로 볼 때 백두산 정계비에서 언급된 두만강 이북과 토문강 이동 지역인 동간도 혹은 북간도를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압록강 이북 지역인 서간도도 포함한 남만주 전체를 가리킨다. 간도 영유권 분쟁 당시 우리 선조들은 동으로는 토문강에서 송화강을 거쳐 흑룡강에 이르는 연해주를 포함한 광활한 지역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서쪽으로는 압록강 대안을 포함해서 고구려의 영토였던 요양과 심양 일대(소위 심요선)까지의 봉금(封禁)지역이 포함된다. 간도의 면적은 얼마나 되나 학자들마다 간도의 면적에 대해 설명하는 바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백두산 정계비가 정한 국경을 지도 위에 표시해보면 그 크기는 한반도 전체 면적과 맞먹는다. 여기에 압록강 대안지역인 서간도까지 포함하면 간도의 면적은 한반도의 1.5배에 해당한다. 일부에서는 간도의 크기를 한반도 면적의 약 10분의 1 정도인 2만1000㎢라고 하는데 이는 일제의 간도파출소가 관할하던 일부 지역만 산정한 잘못된 수치다. 간도를 찾을 가능성은 얼마나 되나 국제법상 강제로 주권을 침탈한 국가가 맺은 조약은 아무런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기 때문에 간도협약 역시 효력을 상실했어야 마땅하다. 중·일간에는 1941년 이전의 모든 조약이 무효라고 합의가 있었고, 한·일간에도 1910년 8월 22일과 그 이전의 모든 조약이 무효라는 확인이 있었다. 그러나 간도협약은 광복 후 혼란기, 한국전쟁, 남북분단의 상황을 거치면서 아무런 이의 제기가 없었기 때문에 현재까지 효력이 지속되고 있다. 국제법 학자들은 간도협약은 국제법의 통념상 틀림없이 무효화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한의 입장은 북한은 간도라는 용어조차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간도 문제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같은 북한의 태도에 대해 중국과 사회주의 이념을 함께 하는 형제국가라는 난처한 입장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그보다는 북한과 중국이 맺은 비밀조약이 북한의 입을 막고 있다는 해석이 더 신빙성 있어 보인다. 북한은 1974년 중국과 ‘조·중 변계조약’을 맺고 새로운 국경선을 획정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비밀조약으로, 정확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어쨌거나 남북이 통일될 경우 ‘조·중 변계조약’은 비합법적 정부간에 체결된 조약이라는 이유로 무효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비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도 가정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정부가 이 문제를 직접 거론하고 나서는 것이 문제를 푸는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간도협약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이를 중국과 국제사회에 즉각 알려야 한다. 이를 통해 간도 문제를 국제사회의 이슈로 부각시키고 영유권 분쟁이 있는 지역임을 공인받아야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는 재중동포에게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국가간의 영유권 분쟁시 현지 주민의 의사가 중요한 결정변수가 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인구는 전체 주민의 40%선((2004년 추정)으로 떨어지는 등 10년 내에 조선족자치주 자체가 소멸될 수도 있는 위기상황이다. 따라서 간도에 대한 영유권 확보에 있어서 재중동포의 와해를 막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사업은 대단히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다. 또 중국의 동북공정의 궁극적 목표가 간도영유권의 고착화에 있음을 간파하고 역으로 우리는 간도의 영유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우리의 영토를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정한 헌법 제3조의 내용을 북방영토를 포함한 내용으로 수정해 교과서 및 역사서, 각종 지도에 간도지역이 포함되도록 해야 한다. <도움말=한국간도학회·간도되찾기운동본부> <경향닷컴 서상준기자 ssjun@kha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