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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면모는 다른 어떤 성도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점입니다. 또한 어린 나이에 경상도에서 전라도 땅으로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세속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만큼 복남은 남다른 성도였으며 아마도 상제님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는 분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은 사람의 영성에 초점을 맞추어 복남 성도님을 알아보겠습니다.
우선『도전(道典)』의 다음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복남에게 말씀하시기를“천상에서 사람을 내보낼 때는 유리로 얼굴을 씌우느니라. 그래야 자기가 무슨 혼으로 있다가 태어난 줄을 모른다. 그것을 알고 나오면 뭔 일을 저지르느니라.”하시니라. (道典9:216:1∼4)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나 막 태어났을 때에는 세상일을 다 아느니라. 그러다가 곡기(穀氣)가 나서 죽도 먹고, 밥도 먹고 하면서 잊어버리는 것이니 화(火)한 것을 입에 넣으면 세상 이치를 모르느니라.”하시니라. (道典9:215:1∼3)
저승에서 이승으로 오는 윤회의 어떤 메커니즘을 엿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태어날 때는 저승에서의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알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얼굴을 유리로 씌운다.”는 말씀은 참으로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씌우면’가려지고 가려지면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어집니다. 사람이 자신의 전생을 환히 알고 이생의 삶을 산다면 큰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전생의 원한을 갚는다고 철천지원수를 찾아 헤매거나 그 후손들에게 보복을 할 수도 있을 것이며, 전생에 못다 한 사랑을 이룬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편 상제님은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나 막 태어났을 때는 세상일을 다 아는데, 서서히 지상의 음식을 먹으면서 세상 이치를 모르게 된다는 것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도 걱정하신 복남의 밝은 영기
하지만 복남은 달랐습니다. 3살 때 만물의 속을 환히 들여다보는 신안(神眼)을 가졌습니다. 상제님은 어린 복남의 이러한 밝은 영성을 오히려 걱정하셨습니다. 어린 복남이 안다고 막 떠들고 잘난 척 하다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그리하여 1898년 무술(戊戌)년 복남이 11살 되던 해 영기를 눌러주시게 됩니다.
이 때 백복남이 증산을 모시면서 가끔 집을 오가거늘 하루는 증산께서 앞날을 걱정하시어 복남의 영(靈)기운을 눌러 주시니라. 이후로 복남이 세상을 보니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신도(神道)가 보일 듯 말 듯하거늘 답답하여 눈물을 흘리며 증산께 하소연하니 증산께서“너는 귀먹고 벙어리여야 산다.”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남이 욕하고 뭣 해도 너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하시니라. (道典1:72:1∼8)
안개가 옅게 끼면 일정거리만 가시권이 확보되면서 사물을 제한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안개가 아주 짙게 끼면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게 됩니다. 상제님은 복남의 신안을 완전히 막으신 것이 아니라 보일 듯 말 듯한 답답한 경지에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1907년 정미년 20살 되던 해 복남의 영기를 다시 열어주십니다.
정미년에 이르러 하루는 상제님께서 복남에게 말씀하시기를“이제 네가 모든 영을 보아야 한다.”하시더니 열한 살 되던 해에 막아 두시었던 영기(靈氣)를 다시 열어 주시니라. 복남이 신령한 영기로 세상을 새로보매 만물이 이미 이전의 그 모습이 아니요 마치 장님이 눈을 떠 대광명을 찾은 듯하거늘 “내가 그 동안 어두운 세상을 살았다!”하며 기뻐하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앞으로 할 일을 일러 주시니라. (道典3:178:1∼5)
이 말씀을 통해 영의 눈을 가지고 사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과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마치 장님이 대 광명을 찾은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영성(靈性)이 어두워진 오늘의 물질문명
다 알다시피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습니다. 그것을 육안(肉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눈이 있습니다. 사물의 속을 보는 눈, 영을 보는 눈, 영적 세계, 신명계를 보는 눈 등등으로 불리는 신안(神眼), 영안(靈眼)입니다. 이것을 흔히 제3의 눈이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의 신안은 복남이 가졌던‘안개가 끼인 것처럼 보일 듯 말 듯한 경지’도 아니고 완전히 닫힌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으로는 완전히 까막눈입니다(물론 우리 주위에는 경지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신안을 회복한 사람도 있습니다).
복남 성도에 대한 성구를 읽다보면 오늘의 우리 시대가 얼마나 영성(靈性)을 상실했으며, 영적 세계에 무지하고 육적이고 물질적인 면에 치우친 시대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이익 추구에만 몰두하고 사후의 일, 영의 세계를 고려하지 않고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짧은 이승의 삶을 마치고 저승으로 가서는 다음 상제님 말씀과도 같은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지은 죄상은 만인경(萬人鏡)에 비추어 보면 제 죄를 제가 알게 되니 한탄한들 무엇 하리. 죄는 남의 천륜(天倫)을 끊는 죄가 가장 크니라. 유부녀를 범한 죄는 워낙 큰 죄이므로 내가 관계하지 아니하노라. (道典2:106:1∼3)
누구든 만인경(萬人鏡) 앞에 서면 자신이 이승의 삶을 살면서 행한 말과 행동 등 모든 것이 영화 필름 돌아가듯 쭈욱 비쳐져 나옵니다. 그곳에는 거짓과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이생에서 잘하고 잘 못한 것이 그대로 투영됩니다. 남을 위해 봉사한 것, 옳은 일을 한 것은 물론 남을 음해한 것, 거짓말 한 것, 훔쳐 먹은 것 등 등 온갖 것이 다 나옵니다. 아마도 사람들이‘만인경’ 이라는 이 석 자만 확실히 알아도 지구상의 많은 죄악은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오늘의 문명은 영적인 면에 너무도 무지합니다. 다음 상제님 말씀은 인간의 삶이 영적인 차원[神道]에서 관찰되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사람마다 각기 주도신(晝睹神), 야도신(夜睹神)을 하나씩 붙여 밤낮으로 그 일거일동을 치부(置簿)케 하리니 신명들이 공심판(公審判), 사심판(私審判)을 할 때에 무슨 수로 거짓 증언을 하리오. 너희들은 오직 마음을 잘 닦아 앞으로 오는 좋은 세상을 맞으라. (道典7:64:4∼6)
하루는 복남에게 말씀하시기를“귀신하고 사람하고 시방 같이 댕겨.”하시니라. (道典2:61:6)
인간계와 신명계는 따로 떨어져 별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틀 안에서 공존하며 서로 기운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맞이하는 후천 5만년 가을세상에서는 신인이 합일하고 영육이 병진하는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신통과 도통의 문제
『도전』1편 47장을 보면 백복남 성도는 7살의 나이에 동학전투에 참여하여 동학군들을 지휘하고 전투에 대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동학사(東學史)에 면면히 흘러나오는‘오세동이’에 대한 전설의 주인공이 바로 백복남 성도입니다.
복남은 15살의 나이에 중형을 좇아 동학전투에 참여하였던 문남용(후일의 문공신 성도)에게 큰 충격을 주어 전쟁터의 사지를 벗어나게 함은 물론 그의 마음에 도의 세계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을 심어주어, 결국 장성한 그를 상제님의 도문으로 이끌게 됩니다.
이곳을 잘 읽어보면 영의 세계는 현실 인간세계보다 한발 앞서 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이 열린 사람은 현실 삶의 모습이 장차 어떻게 전개될지 미리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이 열리지 않은 사람으로볼 때는 너무도 신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앞일을 미리 안다는 것은 반드시 좋은 것만이 아님을 상제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상제님의 천하사, 천지도수로 프로그램하신 인류의 미래는 여간해서 알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현세에는 아는 자가 없나니 상(相)도 보이지 말고 점(占)도 치지 말지어다. 천지의 일은 때가 이르지 아니하면 사람이 감히 알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 내 일을 미리 알고자 하면 하늘이 그를 벌하느니라. (道典2:33:1∼3)
앞으로의 일을 미리 알고 이를 발설하는 것은 천기누설(天機漏洩)의 죄가 되어 하늘이 벌하는 재앙이 닥치게 됩니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도를 이루면 속으로만 알고 마음에 감춰 두어 있어도 없는 것같이 하여야 하나니 남들에게 뽐내어 비밀을 많이 누설하면 하늘이 도로 밝음을 거두어들이느니라.”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안다고 하여 망령되이 움직여 말로 세상일의 기밀을 많이 누설하고 행동으로 천리를 범하면, 그것이 작을 때는 신벌(神罰)을 받고 크면 천벌(天罰)을 받게 되느니라.”하시니라. (道典8:12:1∼3)
영안이 열리는 것이 반드시 그 사람을 위해 좋은 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영안이 궁극의 경지에 가서 도통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다음 태모님 말씀에 비추어보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도통을 원치 말라. 모르고 짓는 죄는 천지에서 용서를 하되 알고 짓는 죄는 천지에서 용서하지 않나니 도통을 가지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느니라.”하시니라. 다시 말씀하시기를“도통과 조화와 법술을 가졌다 하나 시대를 만나지 못하면 쓸모가 없나니 다 허망한 것이니라. 그 동안 도통을 해서 한 번이라도 써먹은 놈이 있더냐. 도리어 자신에게 해(害)가 미치느니라.” 하시니라. (道典11:284:4∼6)
보이지 않게 천명을 다한 백복남 성도
어린 나이에 상제님을 뵙고, 9년 천지공사의 전 과정에 수종을 든 복남은 어천 후에도 신앙을 지키고 구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천지에서 가장 영이 밝아 상제님이 천지의 주재자이심을 가장 뚫어지게 안 복남이 어천 후에도 일관된 신앙의 길을 걸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과는 달리 제3의 눈으로 영과 육의 세계를 동시에 보고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을 모시고 천지공사 신명공사에 참여한 그로서는 당연한 삶이라 여겨집니다.
복남은 상제님 재세(在世)시 육임도꾼 조직공사(5편 367장), 세운과 도운의 상씨름공사(5편 368장)와 같은 핵심공사에 참여하였고, 어천 직후에는 상제님의 성체를 지켰으며(10편 74장), 천상명부공사(10편 101장)를 행하는 등 천명을 다하였습니다. 또 상제님의 유명을 좇아 후일 안내성 성도 교단에 들어가 천지역사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럼에도『도전』을 보면 복남 성도는 여전히 비밀에 쌓인 분입니다. 비록 후손들에 의해 그의 삶이 증언되었지만 말이죠. 어떤 성도보다도 상제님을 가장 먼저 모셨고, 오래 모신 성도임에 틀림없지만 그에 비해 많은 부분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영적인 세계가 바로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가 모르고 사는 것과도 같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인간의 삶이 주도신 야도신에 의해 치부(置簿)되고, 만인경에 여실히 기록되어 있듯이 복남의 삶, 상제님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수종들은 백복남 성도의 노고는 천지에 그대로 살아있음을 확신합니다.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8.0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