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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산도 도전4:154
증산도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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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과 식민사관, 역사왜곡

고조선과 북방 민족 간의 관계

⊙ 고조선과 흉노족

『단군세기』에는 고조선과 북방 민족 간의 관계를 알려 주는 귀중한 기록들이 있다. 3세 가륵단군 6년(BCE 2177) 조에 나오는“ 임금께서 열양 욕살 삭정索靖을 약수弱水 지방에 유배시켜 종신토록 감옥에 가둬 놓았다. 후에 용서하여 그 땅에 봉하시니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라는 기록과 4세 오사구단군이 재위 원년인 BCE 2137년에 자신의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에 봉했다는 기록, 또 30세 내휴단군 5년(BCE 905)에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 32세 추밀단군 3년(BCE 847)에 선비산鮮卑山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 등이 그것이다.

 

흉노, 선비, 돌궐, 몽골 등 여러 북방민족과 한민족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그들의 세력 부침을 알아보기로 한다.

 

주지하다시피 몽골 고원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남러시아와 동유럽 일대에는 광대한 초원(스텝) 지대가 이어진다. 이들 지역은 유목생활을 영위하는 몽골계와 투르크계에 속하는 다양한 유목민들의 공간이었다. 동양사에서는 중국 북방의 여러 유목민과 중국 간의 갈등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북방민족을 융戎, 적狄, 호胡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면서, 물리치고 억압해야 할 무지하고 흉악한 오랑캐로 여겼다.

 

그러나 북방민족을 오랑캐로 여긴 것은 어디까지나 중화사상에 빠진 중국인들의 편견 때문이다. 북방 유목민들은 분명 정착 농경민과는 다른 생활방식을 채택한 사람들이지만 결코 야만인은 아니었던 것이 실제로 기마술과 야금술 및 금속가공 기술은 중국인들보다 앞서 있었다.

 

⊙ 동방의 삼신과 제천 문화 생활화한 흉노

『단군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흉노의 시조는 한민족이다. 흉노는 그 수가 계속 늘어나 진나라 때 와서는 이미 오르도스와 몽골고원, 천산산맥 일대를 주름잡고 있었다. 흉노는 그 우두머리를 선우單于라 하였다. 흉노는 한나라 초기 묵특선우冒頓單于(BCE 209~BCE 174) 때 서쪽의 월지와 동쪽의 동호東胡를 격파하고 아시아 최초로 대유목 제국을 세웠다. 묵특선우는 흉노 제국을 신교의 삼신문화의 고향인 고조선처럼 셋으로 나눠 통치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자신은 중앙을 통치하고 동쪽은 좌현왕이, 서쪽은 우현왕이 통치하게 하였다. 좌현왕은 우현왕보다 우선시 되었는데 보통 선우의 아들을 좌현왕으로 삼았다.

 

선우는 자신을‘ 탱리고도撑梨孤塗선우’라 하였는데, 탱리撑梨는‘ 하늘’을 뜻하는 흉노어‘ 텡그리Tengri’의 음역이고,‘ 고도’는 아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탱리고도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를 의미한다. 흉노는 천지와 일월을 숭배하고, 나아가 조상을 숭배하였고, 일 년에 세 번 큰 제사를 지냈다. 특히 정월의 춘제春祭와 오월의 용성대제龍城大祭는 대규모 천제였다. 중국 측의 기록에 의하면 흉노는 하늘에 제사지낼 때 이용하는 큰 금상이 있었다고 한다. 흉노의 한 왕인 휴도왕의 땅에 있던‘ 제천금인祭天金人’이 그것이다. 선우는 매일 해와 달에게 절하고 자신이 거처하는 게르(천막집)의 문도 항상 동쪽을 향해 배치하였다. 이처럼 문을 동향으로 한 것은 동쪽을 중시하는 동이족의 관습과 일치하는 것이다.

 

중국 역사서에서 흉노는 BCE 4세기 전국시대에 처음 등장한다.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흉노는 틈만 있으면 연, 조, 진 나라를 침략하는 골칫거리였다. 이 세나라는 모두 흉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장성을 쌓았다. 이것을 연결한 것이 진시황 때 이루어진 만리장성이다. 진시황은 장군 몽염에게 삼십만 군을 주어 흉노에게 반격을 가하고 서쪽의 농서군에서 동쪽의 요동군 갈석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만리장성 축조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고 결국 2세 황제인 호해 때 진나라는 진승과 오광의 반란으로 망했다. 흉노의 위협이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멸망시킨 원인의 하나였던 것이다.

 

진에 이어, 유방이 세운 한나라도 흉노의 공격에 시달렸을 뿐, 흉노를 제압하는데 실패하였다. 한고조 유방의 경우 흉노와의 전쟁에서 포위당했다가 가까스로 뇌물을 주고 빠져나오기도 하였다. 이후 공주와 공납을 보내 굴욕적으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한 무제 때 와서는 다시 흉노와 전쟁을 시작하였는데 이 전쟁은 근 5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한 무제는 흉노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큰 손해를 보았다. 장진퀘이에 의하면 흉노와의 전쟁은 백성들의 생활을 곤궁하게 만들고 국력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무제는 다시는 변방으로 출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은‘ 윤대輪臺의 조서’를 발표하고 자신의 실책을 반성하였다.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하고 그곳에 군현을 설치하려 한 것도 흉노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만조선이 흉노와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 무제 때 한국사와 연관하여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흉노의 비왕 가운데 한 사람인 휴도왕의 아들이 자기 어머니와 함께 한나라의 포로가 된 것이다. 흉노 왕자는 왕의 말을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후에 품위 있는 거동과 성실함이 한 무제의 눈에 띄어 무제의 측근이 되었다. 무제는 이 흉노 왕자 김일제金日?를 뒤에‘투후’로 봉하였다. 투후는 오르도스의 제후라는 뜻이다. 그 후손 중에는 왕후(원제의 비 효원왕후)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왕망王莽도 김일제의 고손이다.

 

외척인 김일제 가문은 왕망이 정권을 잡으면서 최고의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왕망이 몰락하자 위험한 처지에 몰렸다. 정확한 경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들은 한반도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 비문과 중국 시안[西安]에서 발견된 당나라 시대의 묘비명에서 김일제가 신라 김씨 왕가의 조상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사서 기록에 의하면 한 무제가 김일제에게 김씨 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한서』「 김일제전」).

 

1세기 초 한나라에서 망명한 김일제 후손이 신라와 가야에 들어와서 왕권을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가야가 있었던 지역에서 기마민족의 유적이 대거 발견되었다. 유물들 가운데 청동제 솥인 동복銅?은 흉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제사의식을 위해 말에 싣고 다니던 물건으로, 유럽의 훈족 루트에서도 많이 발견되었다.

 

흉노 제국은 BCE 1세기 중반에 내분이 일어나 둘로 분열되었다. 호한야선우가 이끄는 동흉노는 한나라와 동맹을 맺고 중국 북쪽에 머물렀지만 한나라와의 타협하기를 거부한 질지선우가 이끄는 서흉노는 중앙아시아 쪽으로 이주하였다. 동흉노는 한 세기 뒤에는 다시 남북 흉노로 분열되었다. 남흉노는 고비사막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한나라의 번병藩兵(수비병)이 되었다. 몽골 초원은 북흉노가 지배하였다. 그러나 북흉노는 한 제국과 남흉노 연합세력의 공격 때문에 91년에는 몽골리아를 포기하고 중앙아시아의 일리강 유역으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이주에는 가뭄과 병충해 같은 자연환경의 악화에도 기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 남흉노전」에는“ 흉노국은 매년 가뭄과 해충의 습격으로 헐벗은 땅이 수천 리에 달하고 초목은 전부 말라버려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과 가축의 수가 삼분의 이에 이르렀다”라는 기록이 있다. 북흉노는 일리강 인근 오아시스 국가들을 지배하기도 했지만 결국 몽골리아 초원의 새로운 패자인 선비족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2세기 중반 즈음에 더 서쪽으로 옮겨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초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이들은 역사적인 기록에서 사라져 버린 듯했지만, 4세기 중반에 갑자기‘ 훈hun’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훈족은 370년경 흑해 북부에 나타남으로써 처음으로 유럽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들은 볼가강을 건너 남러시아 초원지대에 거주하던 알란족을 공격했고, 이어서 알란족과 함께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을 공격하여 유럽 대륙에 민족이동의 대물결을 야기하였다. 공포에 질려 도주한 게르만족이 밀물처럼 로마 국경 안으로 몰려들자 이를 제어하지 못한 서로마 제국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게르만족의 이동은 서양 역사에서 고대의 종말을 초래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바로 이 게르만족의 이동은 훈족의 공격 때문에 촉발된 것이었다.

 

훈족은 이 시기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 동서 유럽 여러 지역을 침략하여 유럽인에게 커다란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훈족은 아틸라 대왕(395~453) 때에 이르러 유럽 일대를 지배하는 거대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를 훈제국이라 부르는데 우랄산맥에서 동유럽 일대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였다.

 

⊙ 선비족

북흉노가 1세기 말 멀리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떠나 버리자 흉노의 본거지이던 몽골 고원은 일시적으로 공백지대가 되었다. 그리하여 흉노의 지배를 받아오던 여러 유목집단들이 초원을 지배하기 위한 각축이 시작되었다. 각축에서 선비족이 승리하여 북방지역을 통일하였다. 2세기 중반에는 단석괴檀石槐라는 영웅이 나타나 선비의 여러 부족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였다. 이 선비제국은 북으로 바이칼호, 서로 신장의 일리강, 동으로 만주 일대에 걸치는 넓은 땅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선비제국도 다른 유목민들이 세운 다른 제국처럼 여러 부족집단들의 연합체였다.

 

단석괴가 사망하자 선비제국은 순식간에 여러 집단로 분할되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한나라가 망하고 그 뒤를 이어 동탁, 원소, 조조, 유비 등 군웅이 패권을 놓고 다투는 삼국시대와 그 뒤를 이은 위진魏晉 제국이 붕괴하면서 중원이 혼란에 빠지자 선비족은 그 틈을 이용하여 대거 북중국으로 밀고 들어갔다. 탁발拓跋, 모용慕容, 우문宇文, 단段, 걸복乞伏 등의 선비족의 여러 부가 이때 거의 모두 남하하였다고 한다. 중국사에서 말하는 소위 5호16국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탁발부는 대국代國을 세웠고, 모용부는 전연前燕·후연後燕·서연西燕·남연南燕 등의 나라를 세웠다. 또 산서 지역의 흉노는 한漢·전조前趙·후조 등을 세웠다. 이 가운데서 탁발부의 대국은 다른 국가들을 모두 정복하고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이 나라가 북위北魏이다. 북위는 후에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되었는데 다시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이름이 바뀌었다. 수나라는 바로 북주의 귀족인 수국공隋國公 양견이 나라 이름을 수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수는 다시 당으로 이어지는데 수·당의 기원은 바로 선비족인 탁발씨였던 것이다.

 

5호16국 시대에 북방 유목민족들이 중국 본토로만 진출한 것은 아니다. 한반도로도 적지 않은 수가 왔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 김호동 교수는 북방 유목민의 일부가 신라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4~5세기경에 조성된 신라의 대형 적석목관분 무덤에서 중앙아시아의 문화적 기류를 느끼게 하는 유물이 대거 발견되는 것은 이처럼 선비족이 들어왔음을 증명한다. 훈족의 출현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서부에서 민족대이동이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대륙의 동부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커다란 민족이동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북방 유목민들의 이동의 파고는 유럽에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져오고 중국에서는 북방민족이 중원을 장악한 5호16국 시대를 열었으며 한반도와 일본에서는 기마민족의 정권을 성립시켰다. 한마디로 말해 유목민은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를 유목민의 대이동으로 크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 돌궐족

『단군세기』에는 흉노의 시조에 대한 언급뿐 아니라 투르크계인‘ 강거康居’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강거는 흉노의 서쪽에 자리 잡은 유목민으로서『 사기』에도 나온다. 가륵단군 8년에 강거가 반란을 일으키자 단군이 지백특에서 토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백특은 티베트를 가리킨다. 18세 동엄단군 때에는 지백특 사람이 공물을 바치러 왔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록은 고조선의 활동영역이 티베트 인근까지 뻗쳤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단군세기』에 직접 나오지 않지만 투르크 계통의 민족으로서 동양 고대사와 서양 중세사에 큰 영향을 미친 민족이 있다. 바로 투르크족이다. 투르크족은 6세기 중반에 서쪽으로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 몽골과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강력한 유목제국을 세웠다. 이 제국을 건설한 사람들은 스스로 족속 이름을‘ 투르크(Turk)’라 하였는데, 중국 측 자료에는‘ 돌궐突厥’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터키Turkey라는 나라 이름도 바로 이 투르크에서 비롯한 것이다.

 

돌궐 제국은 기원 후 1세기 중반에 흉노가 붕괴된 뒤 실로 500년 만에 초원의 유목민을 통합하고 출현한 국가였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돌궐 제국은 553년에 토문土門이라는 이름의 수령이 몽골리아에 있던 몽골족 국가 유연柔然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이다. 돌궐은 몽골계인 유연의 예속 하에 있던 집단으로 알타이 지역에서 야금 일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돌궐족은 알타이 산지에서 나는 철광석을 제련하는 등 금속가공에 뛰어난 솜씨를 보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돌궐 제국의 건설자인 토문이 죽자 그 영토는 아들 무한과 아우 이스테미에게로 나뉘어졌다. 카간의 칭호를 쓴 아들은 몽골 지역을 차지하여 동돌궐이 되었고,‘ 야브구’라는 칭호를 사용한 이스테미의 나라는 서돌궐이 되었다. 서돌궐은 중앙아시아 일대에 위치하였다.

 

서돌궐은 곧 사산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헤프탈Hephtal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어서 동돌궐은 동쪽으로 거란족을 복속시키고, 북으로 바이칼호에 이르렀다. 남으로는 고비사막을 넘어 당시 북주·북제로 나뉘어 있던 북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당시 북주와 북제는 서로 대립하였기 때문에 북방의 돌궐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경쟁적으로 재물을 갖다 바쳤다.

 

그러나 중국에 당나라가 들어서자 상황은 급속히 바뀌기 시작하였다. 돌궐의 내분이 격화되고 자연재해가 겹쳤기 때문이다. 결국 당나라는 쇠약해진 돌궐, 초원의 대제국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다.

그러나 돌궐은 중국의 지배를 받은 지 반세기 만에 놀랍게도 제국을 부흥시켰다. 만리장성 주변 내몽골 지방에 살면서 당나라의 감시와 통제를 받던 부족민 사이에서 670년대 후반부터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나타나 돌궐 제국을 재건한 것이다. 이것이 제2 돌궐제국이다.

 

다시 일어난 돌궐 제국은 752년에 그 지배하에 있던 세 부족의 반란으로 무너졌다. 세 부족 가운데 하나인 위구르가 몽골의 모든 유목민을 제압하고 돌궐의 뒤를이어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위구르족은 9세기 중반에 몽골고원에서 천재가 빈발한 때에 유목민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망하게 되었다. 돌궐의 후예들은 차츰 서진하여 이란 지역에 왕조(가즈나 왕조)를 세우기도 하고 이슬람을 받아들여 이슬람의 노예와 용병 노릇을 하였다. 그러다가 동로마 제국으로 침투하여 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였다.

 

⊙ 몽골족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단군세기』 4세 오사구단군 조에는 단군이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에 봉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BCE 2137년의 일이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에는‘ 동호東胡’라는 이름의 족속이 나온다. 동호는 만리장성 너머 몽골과 만주 일대에 걸쳐 살던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부른 명칭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몽골족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에 동호가 주로 교류한 나라는 연燕나라였는데, 동호는 4세기에 매우 세력이 강했던 것이 분명하다.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의 인질로 잡혀 있었다는『 사기』의 기록이 그것을 말해 준다. 동호 역시 흉노처럼 야금술과 궁술, 기마 전투술이 뛰어났고, 진개는 인질로 있는 동안 동호의 앞선 기술을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연나라가 쌓은 장성은 바로 이 동호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몽골 일대의 동호는 한대에 흉노의 묵돌선우에게 패한 후(BCE 209년) 약화되었다. 그 후 동호라는 이름은 사서에서 사라지고 선비鮮卑, 오환烏桓으로 바뀌어 등장한다. 선비보다 약했던 오환은 삼국시대 조조의 공격으로 붕괴되어 조씨 권력의 기동부대로 전락하였다. 이것이‘ 오환돌기烏桓突騎’ 부대이다.

 

선비족의 영웅이었던 단석괴 이후 선비 제국이 붕괴되면서 여러 부족(탁발拓跋, 모용慕容, 유연柔然, 거란契丹, 실위室韋)이 분립하였는데 이들 중 앞의 세 부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강력한 국가를 건립하였다. 거란은‘ 키탄’이라 불리는데, 거란의 영웅 야율아보기는 10세기 초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야율아보기는 907년 천제를 거행하고 칭호를‘ 탱그리 카간’이라 하였다. 거란족에게도 카간은 천제의 대행자인 천자였다. 야율아보기는 곧 몽골고원을 장악하고 발해(대진국)을 멸망시켰다. 거란 제국은 이어서 현재의 북경과 대동 일대에 이르는 북중국을 장악하고 송나라와 대치하였다. 거란 제국은 거란족 외에 몽골계 유목민, 한족, 발해 유민, 여진족, 탕구트인 등 다양한 족속을 포괄하였다. 또 중국과 달리 발해의 5경 제도를 계승하였다. 거란 제국은 12세기 초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금나라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금나라는 여진족과 거란족의 연합정권이었기 때문이다.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1162~1227)은 실위족에 속한다. 그러나 실위는 다양한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칭기즈칸이 등장하기 이전에 몽골초원 지역은 투르크계와 몽골계, 퉁구스계가 뒤섞인 다양한 집단의 상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집단 가운데‘ 울루스’가 세력이 컸는데, 칭기즈칸이 속한 울루스는‘ 몽골울루스’였다. 칭기즈칸은 19세에 몽골 울루스의 칸으로 선출되고 곧 동쪽의 타타르 울루스, 중앙의 케레이트 그리고 서쪽의 나이만과 메르키트 등 여러 울루스를 차례로 격파하고 통합하였다. 마침내 1206년 쿠릴타이(몽골 족장회의)에서 몽골 집단 전체의 카간으로 추대되었다.

 

칭기즈칸은 곧 눈길을 초원 밖으로 돌려 중앙아시아 일대를 정복하였다. 그의 아들들은 1222~1223년에 아조프 해 연안에서 러시아 군대와 싸워 이기고 1223년에는 키에프 공국을 공격하였다. 1227년 칭기즈칸이 사망하자 그 후계자들은 정복의 범위를 더 넓혔다.

 

칭기즈칸의 후예인 오고타이(2대 카간 1229~1241), 구유크(3대 카간 1246~1248), 몽케(3대 카간1251~1259), 쿠빌라이(4대 카간 1260~1294)는 정복사업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북부의 금나라를 정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금의 멸망 후에는 네 방향으로 정복사업을 추진하였다. 유럽 원정(1236~242)을 수행한 다음 중동을 공격하여 카프카즈 지역과 셀주크 투르크를 속국으로 삼고(1243) 바그다드를 점령하였다.(1258) 고려도 1236~1241년에 걸쳐 몽골의 공격을 받아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1279년 남송을 멸망시킨 쿠빌라이는 섬나라인 일본과 자바까지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동남아시아는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몽골 제국은 그 지배 지역이 매우 이질적이고 다양하였다. 그러나 효율적인 역참제를 통해 결속을 이뤄 낼 수 있었다. 몽골의 역참제는 제국 전역을 연결하는 조밀하고 광대한 교통 네트워크였다. 동으로 고려와 만주, 서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란과 러시아에 이르는 교통로 상에 역참을 두었고, 남쪽으로는 안남과 버마까지 연결되었다. 역참에는 운송 수단인 말과 수레, 배를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숙박시설도 있었고 패부牌符라는 증명서만 있으면 얼마든지 역참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문서와 서신, 관원과 공적 물자가 신속하게 이동되었다.

 

이러한 역참제를 기반으로 몽골 제국은 상업을 진흥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몽골제국은 중국의 전통적 한족 왕조와 달리 상인을 우대했고 국제무역을 적극 지원했다. 심지어‘ 오르톡’이라는 상인조합에게 행정을 포함한 다양한 국가사업을 맡겼다. 또 통행세를 폐지하고 통상로를 안전하게 만드는 데 신경을 썼기 때문에 몽골 제국 시대에는 동서양 간에 교류가 매우 활발하게 이뤄졌다.

 

몽골 제국은 종교인에게도 관용정책을 취하여 각 종교의 지도자에게 면세 혜택까지 부여하였다. 페르시아나 중국 측 기록에도 남아 있듯이 이슬람·기독교·유대교·유교·불교·도교의 사제나 승려가 그러한 혜택을 누렸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여태까지 국가의 탄압을 받던 소수 교단이 활력을 얻게 되었다. 중국과 중동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가 활발한 활동을 했고 유럽의 가톨릭도 적극적으로 선교사를 몽골 제국으로 파견하였다.

 

이러한 몽골 제국의 개방적인 동서교류 정책은 인류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도 활발한 인적 왕래, 종교의 전파, 상품의 확산을 가져다 주었다. 이것이 소위‘ 팍스 몽골리카’의 실체였다. 이 시대에 위대한 여행기들이 나온 것은 이러한 팍스 몽골리카를 배경으로 한 것임이 틀림없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는 서양인으로서 몽골 제국에 가서 쿠빌라이 칸의 신하로 살다가 귀국하여 견문록을 남겼다. 반대로 동에서 서로 가서 여행기를 남긴 사람들도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장춘진인長春眞人(1148~1127)이다. 산동성 사람으로 도교의 도사이던 그는 칭기즈칸의 부름을 받고 몽골군의 원정에 종군하였다. 알타이산을 넘어 천산북로를 따라 사마르칸트에 갔고 후에 남쪽으로 힌두쿠시 산맥을 넘었다. 장춘진인의 기행문은 『장춘진인서유록長春眞人西遊錄』으로서 13세기 몽골 제국 시대의 동서교통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다.

 

이처럼 몽골이 주도하던 13~14세기 때에는 동서 간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고, 이러한 교류는 다시 근대를 열어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요컨대 몽골 지역을 중심으로 한 북방 지역에서 일어났던 흉노, 선비, 돌궐, 몽골 등 여러 족속은 상고 시대에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의 흐름을 이끈 주도 세력으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원문: 상생출판 환단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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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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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도가(道家)의 최풍헌(崔風憲) 기사입력 2008-06-30 23:05 조용헌"지난 임진왜란에 정란(靖亂)의 책임을 최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 일에 지나지 못하고, 진묵(震默)이 맡았으면 석 달을 넘기지 않고, 송구봉(宋龜峯)이 맡았으면 여덟 달 ...  
65 한민족의 저력을 밝혀줄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file 태일[太一] 532 2012-12-27
한민족의 저력을 밝혀줄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월드컵 신화를 연 대한민국 대~한민국! 짝짝짝 짝 짝! 다시 월드컵의 계절이 돌아왔다. 우리는 지난 2002년 6월, 기적과 같은‘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하면서 한일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그로부터 8년이...  
64 치우천황의 천부사상 file 태일[太一] 515 2012-12-02
치우천황의 천부사상 배달국 14대 자오지 환웅천황께서 81명의 형제종당을 각 군의 제장으로 삼아 황제헌원과 10년 동안 싸워 73회를 전승한 끝에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볼 것은 81군단이 이루어...  
63 1만년 역사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file 태일[太一] 499 2012-12-27
1만년 역사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중국 1만년 역사 프로젝트 동북공정의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역사 문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이미 중국은 1996년에 시작한 단대공정으로 하, 상(은), 주 3대 왕조의 연대를 확정짓고 그 실행 ...  
62 태백일사(太白逸史) 속 환단(桓檀)이 책 제목이 되기까지 file 태일[太一] 419 2012-12-26
태백일사(太白逸史) 속 환단(桓檀)이 책 제목이 되기까지 桓檀(환단)이란 단어가 처음 쓰인 것은 언제 부터일까? 본래의 뜻은 무엇일까? 어떠한 연유로 책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일까? 이 모든 것이 환단고기(桓檀古記) 5번째 역사 책 태백일사(太白逸史)에...  
61 호랑이 거시기에 힘이 꽉 찰 때 대한민국은 비상한다 . file 진리의 빛 410 2008-12-27
호랑이 거시기에 힘이 꽉 찰 때 대한민국은 비상한다 . 한반도는 만주를 희롱하는 호랑이 형상 http://blog.empas.com/bgjhhj/21786747_757x757.jpg 조선 명종때 풍수지리학자이자 예언자인 남사고(南師古) 선생은 『동해산수비록(東海山水□錄)』에서 "한반도...  
60 신교의 제천 의식 (제사문화) 자취 file 태일[太一] 380 2012-12-27
신교의 제천 의식 (제사문화) 자취 신교의 의식(儀式)은 제천(祭天- 증산도에서 드리는 치성이 바로 제천 의식이다)의식입니다. 쉽게 말해 제사 지내는 문화입니다. 일반적으로 제사문화를 중국의 문화라고 위대한(?) 착각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사 지내...  
59 한민족 옛 제국 9고구려의 역사 file 태일[太一] 360 2012-12-02
한민족 옛 제국 9고구려의 역사 1. 구려九黎 배달국 13세 사와라 환웅 초년(BCE277?)에 웅녀군熊女君의 후예를 일러‘려黎’라 하니,‘려黎’는 비로소 단허檀墟에 봉함을 받아 왕검王儉이 되었다. 삼한관경본기> 삼한관경본기에 의하면 왕검 려黎의 나라 대읍국...  
58 삼신三神신앙과 삼신三神상제님 file 태일[太一] 359 2012-12-27
삼신三神신앙과 삼신三神상제님    이해영/ 서울 관악도장      나는 어디서 태어났나  요사이엔 아기를 낳을 때면 산부인과를 찾지만, 예전엔 동네에서 출산을 도운 경험이 많은 할머니를 집으로 불러들여 아이를 낳는 경우가 흔했다. 그런 할머니를 ...  
57 미륵의 세상, 미륵의 일꾼을 꿈꾸며 file 태일[太一] 356 2012-12-27
미륵의 세상, 미륵의 일꾼을 꿈꾸며    “비나이다 비나이다. 미륵님! 칠성님!”    이것은 우리 부모, 조상 세대들이 우리들을 위해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믿음으로 두손 닳도록 간절히 하늘의 신(神)에게 빌며 기도했던 우리 민족의 전통적 ...  
56 30여년 집필 ‘환단고기 역주본’ 펴낸 안경전 증산도 종도사 file 태일[太一] 349 201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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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하늘보다 큰, “단군세기 서문” 강독 file 태일[太一] 332 2012-11-24
하늘보다 큰, “단군세기 서문” 강독 하늘보다 큰 강독, 증산도 종정님의 “단군세기 서문” 강독을 일독하시길 바랍니다. “삼신즉일상제”와 “삼일사상” 등에 관한 종정님의 강독은 ‘삼신과 상제와의 관계’, ‘일기一氣를 타고 만유를 조 화하시는 하느님의 문제’ ...  
54 가림토문자와 우주변화의 원리(제2부) file 태일[太一] 332 2012-12-02
가림토문자와 우주변화의 원리(제2부) 제2장. 수상으로 보는 가림토 문자 모음의 창제 원리 가. 집일함삼 회삼귀일의 원리. 문자의 근원이 되는 수상(數象)의 이치에 대하여 환단고기에서는 함회집귀지의(含會執歸之義)를 이야기한다. 함(含)이란 집일함삼(執...  
53 『진인도통연계(眞人道通聯系)』 file 진리의 빛 324 2008-09-28
『진인도통연계(眞人道通聯系)』 주장춘(명나라 신종때 절강성 오흥현사람. 자는 대복 신종 만력 때(1573-1620년)에 진사에 올라 형주부사까지 벼슬 오름. 저서로 관자각이 있음) 山之祖宗은 昆崙山이니 原名은 須彌山也라. 산의 근원은 곤륜산이니, 곤륜산의...  
52 생활속에 내려오는 개벽이야기 file 태일[太一] 310 2008-10-15
우리민족의 생활속에서 전해내려오는 개벽에 대한 속담이나 격언, 육두문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렸하고 산천이 수려하여 수많은 선조들이 수행을 하여 많은 도인들이 나왔습니다. 그런 많은 도인들이 후손들에게 닥쳐올 개벽을 ...  
51 삼족오에 숨어있는 한민족의 역사정신과 철학 file 태일[太一] 302 2012-12-27
삼족오에 숨어있는 한민족의 역사정신과 철학   요즘 대하 역사드라마 〈주몽〉에 시청자들이 열광하고 있다.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그린 〈주몽〉을 보면, 동부여의 신녀(神女) 여미을에게 ‘삼족오’가 나타나는 장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고구려 고분벽화...  
50 한민족의 신교문화 file 태일[太一] 296 2012-12-27
신교 문화란 무엇인가?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 하니 왈풍류曰風流라(나라에 지극히 신령스러운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이 문구는 신라 때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鸞郞碑序」의 첫 구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풍류風流의 본래 이름이 바로 한민족...  
49 안파견 환인의 1천년 수명, 어떻게 볼 것인가? file 태일[太一] 287 2012-11-24
안파견 환인의 1천년 수명, 어떻게 볼 것인가? 환국과 7대 환인의 수명 BCE7198년에 개국한 환국은, 7분의 환인이 계셨는데, 1대 안파견, 2대 혁서, 3대 고시리, 4대 주우양, 5대 석제임, 6대 구을리, 7대 지위리입니다. 7분의 환인이 다스린 통치기간은 총 33...  
» 고조선과 북방 민족 간의 관계 file 태일[太一] 287 2012-12-27
고조선과 북방 민족 간의 관계 ⊙ 고조선과 흉노족 『단군세기』에는 고조선과 북방 민족 간의 관계를 알려 주는 귀중한 기록들이 있다. 3세 가륵단군 6년(BCE 2177) 조에 나오는“ 임금께서 열양 욕살 삭정索靖을 약수弱水 지방에 유배시켜 종신토록 감옥에 가...  
47 풀리지 않는 예언 궁을가를 풀다 맑은바람 283 2008-09-15
<< 궁을가 해제 >> [궁을가(弓乙歌)에 ‘조선강산 명산이라 도통군자 다시 난다.’하였으니 또한 나 의 일을 이름이니라.] (道典 3:129:13) 궁을가는 증산 상제님께서 직접 인용하시고 확인해 주신 비결가사(秘訣歌詞)이다. 궁을가는 ‘대개벽기에 살길을 만나려...